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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음식으로 마음 다스리기

수년 전 모녀가 함께 치료를 받으러 온 적이 있다. 어머니는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따님은 피로증후군으로 보약을 지으러 왔는데, 따님의 표정이 매우 밝아보였다. ‘100퍼센트 긍정의 표정이란 저런 것일까?’라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진찰 과정에서 이 분이 우울증으로 렉사프로를 복용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이 분처럼 젊은층의 향정신성의약품(이후 향정으로 표기)의 복용이 급증하고 리스트컷이 유행하는 등 정신의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사회 전체적으로 병이 시름시름 깊어가고 있다. 불안과 분노를 달래고자 약물에 의존하는 것. 하지만 향정은 강한 의존성이 있어 마약과 별 차이 없고 장기 복용시 폐인이 되는 경우가 많아 주의가 요구된다. 빈대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 근본치료를 방해할 것이 분명하여 중단을 권고하니 어렵다고 하여 보약만 지어서 돌려보냈다.

감정은 늘 자연스러운 기복이 존재한다. 오름이 있으면 내려감이 있고 내려가면 언젠가는 다시 올라온다. 그렇게 오르락내리락 하며 현재 내게 주어진 환경에 걸맞는 적당한 조율점을 찾는다. 하지만 약물이 만들어내는 감정은 그러한 기복이 잘 느껴지지 않을 것이다. 약물이 만들어내는 압력이 작용할 테니 한동안 꾸준히 기복없는 명랑함을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약물을 잠시 중단해보면 그 기복은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훨씬 더 격심해질 것이다. 그 동안 눌러놓은 만큼 반동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이 분은 본인이 마음의 문제를 상담하는 카페를 운영중이라고 하여 필자를 놀라게 했다. '완벽한 마음의 평정을 얻어야만 남을 상담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다. 하지만 약물에 의존중인 상태에서 누구를 도울 수 있겠는가? 장님이 장님을 인도하는 격 아닐까? 행복전도사로 알려진 유명 방송인이 자가면역질환을 비관하여 자살했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다. 늘 아름다운 미소로 카메라 세례를 받던 유명 여배우들이 프로포폴에 중독되어 쇠고랑을 차기도 한다. 남한테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에만 취해 있다 보니 자신이 정말 어떠한지 보지 못하고 길을 잃어버린 것일까? 불행이 완전히 나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지금 잘못된 길로 가고 있다는 것을 알려주는 ‘인생의 네비게이션’ 역할을 한다. 방향을 이제 바꿀 때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새로운 꿈을 꾸어야 할 때다. 아니면 같은 현실을 새롭게 해석이라도 해야 한다.    

인생의 날씨가 언제나 ‘맑음’일 수만은 없다. 가끔 흐릴 때마다 본인의 삶을 돌아보고 스스로에게 맞는 길을 찾아가면 더 화창한 날씨가 찾아올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노력을 하지 않고 약물에 의존해서 순간을 모면하려고 하면 더 큰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어느 시인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분노하지 말라'고 하였지만 삶이 우리를 속인 게 아니라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이고 있는 건 아닐까? 향정신성의약품은 자기기만, 현실도피, 합법적인 마약이다. 향정신성의약품의 대표적인 부작용 가운데 자살충동이나 폭력성향이 있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최근 정신과의사 한 분이 환자에게 살해당한 일은 잘못된 의료의 폐해가 이제 환자를 넘어 의료인 자신에게도 되돌아올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의료인의 보호를 강화한다고 무엇이 해결되겠는가? 진실에 눈감고 회피하려는 태도 아닌가? 의사 한 사람이 개인적으로 도덕적이고 고결한 성품을 가졌더라도 그가 환자에게 대증요법을 쓰고 있다면 세상을 병들게 할 것이고, 세상은 다시 그에게 되갚아줄 것이다. 영화 <매그놀리아>가 보여준 것처럼 인생에 우연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업業이 돌고 돌아 나 자신에게 돌아온다.

약물이 만들어낸 행복은 '가짜 행복'이다. 가족에게 받은 상처가 약물로 치유될 수는 없다. 독자 여러분이 가족에게 상처를 받았다면 그 가족도 마음의 병을 앓고 있을 것이다. 병든 세상에서 받은 상처를 다시 주변 사람들에게 토해낸다. 그 가족은 당신의 말을 전혀 듣지 않을 것이고, 화만 낼 것이고, 자기 세계 안에서 갇혀서 밖으로 나오지 않을 것이다. 그는 고통을 주는 세상에서 스스로를 보호하려고 단단한 껍질을 뒤집어쓰고 낡은 방식을 고집한다. 새로운 방법을 모색하기에는 그는 이제 지쳐버렸다. 그 사람은 자기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그 사람은 원인이 아니라 결과다. 병든 세상을 바로잡을 수 있는 원인이 되지 못하고 그 병든 세상으로부터 파생되어진 결과가 되어버렸다. 우리 모두는 너무 약해서 세상에 휘둘린다. 그 자신은 그것을 모른다. 이것을 이해한다면 맞대응이 아니라 연민을 느끼게 되고 진정한 의미에서 용서하게 된다. 그리고 그 관계에서 자유롭게 된다. 마음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상처를 준 사람들과 반드시 직접 만나서 화해할 필요는 없다. 내 마음 속에서 진심으로 화해를 하면 된다. 그리고 그 사람을 도와줄 수 없다면 떨어져 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다. 

약물보다 명상이 낫다. 명상은 자기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다. 단지 들여다보는 것 만으로는 어느 정도 치유효과가 있다. 명상은 의식이 과거나 미래로 도망가지 못하게 '지금 여기'에 꽉 붙들어둔다. 과거는 지나가버렸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우리가 만나는 삶은 오로지 지금 여기 뿐이니 지금 여기에 완전히 몰입함으로써 과도한 번민과 집착에서 벗어나서 마음을 가벼이 하는 것이다. 과거에 잃어버린 것을 추억하며 또는 미래에 도래할 기쁨을 떠올리며 하루 하루를 버티는 것이 아니라 유일한 현실인 '지금 여기'를 붙잡아야 한다. '지금 여기'를 편안하게, 평화롭게 만들어야 한다. 그렇게 하지 못하면 삶은 피상적이 되고 내면의 불만을 보상하려고 더 해로운 것들을 내 삶에 불러들이게 된다. 동양에서는 오래 전부터 '지금 여기'를 붙잡는 전통이 존재했다. 대표적으로는 불교의 선禪을 들 수 있다. 기독교의 묵상이나 기도도 본래의 의미는 신에게 무엇을 간구하는 것이 아니라 신의 뜻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에서 유래한다. (기독교의 '아멘'이나 이슬람교의 '인샬라'는 ‘신의 뜻대로 이루어지길 바랍니다’라는 뜻이다.) 그 본질은 다 같은 셈이다. 약물이 단기적인 만족을 추구하다가 여러 가지 부작용에 시달리는 것에 반해 명상은 자기성찰을 통해 장기적으로 올바른 삶의 방향 전환을 가능하게 한다. 이 때 고뇌는 삶의 깊이를 만드는 자양분이 된다.   

보통 이러한 수행에는 음식을 중요하게 다루었다. 수행자들은 어떤 음식을 먹느냐에 따라 의식의 상태가 매우 섬세하게 영향 받는다는 것을 오래 전부터 깨달았기 때문에 각 종파의 수행과정에서 특정 음식을 가리는 지침이 발달해왔다. 체질식이요법은 그러한 발달의 끝에 있다. 여태까지의 수행법에서는 모든 사람을 똑같이 보고 '같은 음식을 가리라'고 하였기에 그 음식법이 맞는 사람은 편함을 느끼고 수행에 정진할 수 있었으나 그 음식법이 맞지 않는 사람은 중도에 포기하기 일쑤였다. 하지만 체질식은 체질마다 본인에게 이로운 것은 취하고 해로운 것은 피하여 몸과 마음을 안정시키니 모두의 치유와 평화에 도움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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