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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약물로 인한 두통과 불면증

중년의 여성이 진료실로 들어왔다. 목, 어깨, 등이 아프고 잠이 안 온다고 한다. 몇 번 치료하니 통증은 줄었는데 마음이 심란하셨는지 심리학 책을 한 권 빌려가셨다. 그리고 다음해 봄에 오셔서 이야기하길, 부부갈등이 있는데 남편은 자기 탓만 하면서 정신과에 데려가서 약을 먹이고 있다는 것이다. 작년 겨울부터 그랬다는데 그 뒤로 머리가 영 맑지 않다는 것. 본인은 약을 끊고 싶다고 하여 "원하시면 안전하게 약을 끊을 수 있도록 도와드리겠다"고 하였다. 복용중인 약물을 살펴보니 리튬, 설트랄린,알프라졸람 등 향정신성약품인데 이 약들은 부작용으로 두통·어지럼증·기억장애·불면증 등을 유발할 수 있어 현재 증세와 연관성이 높았다. 이 분은 체질을 이미 감별한 상태여서 치료가 일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약을 중단하고 자율신경계를 안정시키는 침을 시술하면서 두 달간 지켜보니 심신에 큰 불편함을 느끼지 않았고, 머리는 점점 맑아졌으며, 잠도 깊이 오고, 마음도 편하다고 하여 완치되었음을 알려주었다. 몇 달 후 들리셨는데 조카와 여행을 다녀오셨다고 했고, 밝아보였다.


애정이 식어버린 부부는 드라마의 단골소재다.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다보면 서로 갈등이 쌓이는데, 약물은 대화 없이 이런 갈등을 덮어버리는 수단으로 사용될 때가 있다. 하지만 이것은 위험한 선택이다. 중추신경계는 몸을 치유하는 메커니즘의 관문인데 그것을 약물로 억제하면 그런 자연스러운 치유는 불가능해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병은 속으로 깊어지고 약물중독이 될 수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부부갈등은 대화가 필요하지 약물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남녀가 단기간에 친해지려면 서로의 공통점을 찾으면 되지만 장기간 함께 살려면 서로 다른 점을 이해해야 한다. 강압적으로 자기 방식을 내세우고 상대를 비정상으로 몰아가면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최근 향정신성의약품 사용이 크게 확산되고 있다. 제약산업이야 신이 나겠지만 근본치료의 관점에서는 염려스러운 징조가 아닐 수 없다. 예전에 젊은 여성이 그 어머니와 함께 찾아온 적이 있다. 이 여성은 항우울제를 복용했는데, 어머니는 딸이 그런 식으로 마음의 괴로움을 풀어보려는 모습이 걱정되셨는지 필자에게 데려온 것이다. 그런 걱정은 합리적이다. 갈등이나 우울은 그저 새로운 변화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 지금의 삶이 나와 맞지 않기에 갈등하고, 번민하며, 우울한 것이다. 안주하지 말고 본인에게 맞는 삶의 방식을 끝없이 묻고 찾아야 하지 않을까? 현재의 상황에 멈춰서 약물에 의존하면 당연히 마음의 병은 깊어질 것이다. 이 여성은 "예전에는 정신과약을 정신병 환자만 먹는다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보통사람도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인식이 바뀌지 않았나요?"라고 반문하여 필자를 놀라게 했다. 이 여성은 본인이 복용중인 약이 몸에서 어떻게 작용하는지 이해한 다음에도 과연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그 약의 부작용을 본인의 몸에서 나오는 증상과 대조해 본 다음에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중추신경계를 억제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이해한 다음에도 그렇게 말할 수 있을지 알고 싶다. 한편 그렇게 받아들이도록 세뇌하는 세련된 의료마케팅이 무섭다. 내 가족도 저렇게 안일하게 생각하면 어쩌나 겁도 난다. 보통사람들이 거의 전부 미디어를 통해 세뇌당해서 나중에는, 가족한테 "그건 위험하다"고 경고하는 내 메세지조차 "뭘 모르시네, 티비도 안 봐요?"라는 핀잔이나 듣지 않을지.


심심치 않게 들려오는 유명인들의 자살 뉴스를 보면 눈에 띄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우울증이 있어서 치료중이었다"는 것이다. 치료중인데 자살한 것은 조금 이상하게 들린다. '그 치료에 문제가 있는 건 아닌가? 어쩌면 그 치료가 자살을 유도한 것은 아닐까?' 오래 전 그런 의심을 했었다. 그리고 그 약물들의 작용 기전을 살펴보면서 충분히 그런 반응을 유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요즘은 이런 정보들이 수면 위에 떠올라서 많은 사람들이 인식하고 언론에서도 경계하지만, 불과 수년 전만 하더라도 이런 사고에 대하여 사람들은 "그냥 우연이겠지" 하고 말았으니 얼마나 무서운 일인가? http://www.mo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2694

'그것이 알고 싶다'에서 다룬 졸피뎀의 케이스는 빙산의 일각일 뿐, 우리 시대는 수많은 사람들이 합법적으로 마약중독자가 되어가고 있고, 시나브로 미쳐가고 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비극적인 결과는 사람 마음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의 인과관계에 대하여 잘못된 추론을 한 것이 원인으로 추정된다. 

 

현대 생리학이 밝혀낸 사실에 의하면 사람의 마음은 도파민, 노르아드레날린, 세로토닌 같은 호르몬과 관련이 있다. 도파민은 쾌락의 상황에 직면할 때 나오고, 긍정적인 마음과 연결된다. 노르아드레날린은 고통의 상황에 직면할 때 나오며, 부정적인 마음과 연결된다. 세로토닌은 쾌락도 아니고 고통도 아닌 평화로운 상황에서 나오고, 행복한 마음과 연결된다. 각각의 호르몬은 주어진 상황에 몸을 적응시키기 위해 분비된다. 적의 공격을 받거나 사고를 당하는 등 괴로운 상황을 당하면 노르아드레날린이 분비되어 혈관을 수축시키고 혈압을 올리는 등의 반응을 만들어낸다. 반대로 아름다운 이성과 함께 있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흥미를 끄는 과제가 주어질 경우 도파민이 분비되어 동기를 유발하고 스스로를 움직여 눈 앞의 대상에 몰입하도록 돕는다. 고통도 아니고 쾌락도 아닌 평화로운 상태에서는 세로토닌이 분비된다. 이것은 의식의 초점이 외부가 아닌 내부가 된다. 외부에 주의를 끄는게 사라졌을 때 비로소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데 그 평정한 상태에서 분비된다. 이것은 깊은 명상이나 고요한 행복의 상태에서 나온다. 


여기서 각 호르몬은 원인이 아니라 주어진 상황의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결과물이다. 그런데 지금 유행하는 의학은 이것을 결과가 아니라 원인으로 착각하고 있다. 그래서 불행하다고 하면 세로토닌을 인위적으로 늘려준다. '선택적 세로토닌 재흡수 억제제(Selective Serotonin Reuptake Inhibitors, SSRI)'가 그런 약이다. 분비된 세로토닌은 본래 제 기능을 다하면 다시 흡수되어 사라지는데 이것을 막아버리는 것이다. 그렇게 세로토닌의 총량을 늘려주는 것이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행복한 기분을 유도한다. 하지만 여기에 함정이 있다. 그 사람을 불행하게 만들었던 조건은 변한 게 없기 때문이다. 그 사람은 본인 체질에 안맞는 생활습관을 갖고 있을 것이고 그것이 그의 내부장기 불균형을 확대하여 만성적인 불쾌감이나 우울함에 빠지게 되었다. 그가 SSRI에 의존할 때 이러한 조건에는 아무 변화가 없다. 그렇다면 여전히 그러한 조건들은 그를 우울하게 유도하는 생화학적 압력을 가하고 있을 것이다. 단지 그러한 압력이 전달되는 경로의 마지막 밸브를 SSRI가 틀어막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인위적인 차단 덕분에 그 압력은 해소가 되지 못한 채 점점 강해질 것이다. 마치 호스의 끝을 손으로 막고 반대쪽에서 물을 계속 더 많이 공급하는 것처럼 그 압력은 점증할 것이고 한계에 달하면 폭발할 것이다. 그 결과 생화학적 반응이 초래할 불행한 느낌은, 애초에 그런 약물을 사용하지 않았더라면 나타났을 수준을 크게 상회하게 될 것이고, 그것은 환자 본인한테는 죽고 싶을 만큼 불행한 기분, 즉 자살충동이 될 것이다. 실제로 SSRI의 잘 알려진 부작용 중 하나가 자살충동이다. 단지 통계학적 지식을 근거로 그 약물을 복용할 때 일시적으로 효과가 있다고 해도 그것이 장기적으로 또는 최종적으로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이해한다면 이런 요법은 본래의 목표에서 많이 벗어남을 깨닫게 된다.


각 호르몬은 주어진 환경(고통-쾌락-평정)에서 몸을 적응시키려고 분비된다. 위기의 상황에서 노르아드레날린이 분비되지 않는다면 제대로 대응할 수 없을 것이다. 쾌락의 상황에서 도파민이 분비되지 않는다면 몰입할 수 없을 것이다. 스스로를 바라볼 때 세로토닌이 분비되지 않는다면 평정을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분비되어야 하고 분비된다. 이것은 몸의 자연스러운 질서다.


만일 불행한 사람에게 세로토닌이 분비되거나 세로토닌이 감소하는 것을 막아버린다면 그는 자기의 비틀어진 삶을 어떻게 바로잡겠는가? 그가 어떤 감각에 기대어 자기 삶을 돌아보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이런 이유로 행복한 돼지보다 불행한 소크라테스가 낫다. 행복한 돼지는 결국 잡아먹힐 것이다. 하지만 불행한 소크라테스는 다시 행복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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