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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체질중심의학

오래 전 아토피를 치료해준 아이의 부모님한테서 연락이 온 적이 있다. 아이가 다른 병원에서 준 감기약을 복용하다가 며칠 코피를 쏟는다고 한다. 그 아이가 먹은 약은 레보코트액과 코대원포르테였다. 레보코트액은 레보세티리진염산염 성분의 항히스타민제다. 그 약물의 부작용을 살펴보고 아이의 증상과 관련된 항목들을 표시해보았다.


1) 정신신경계: 졸음, 때때로 권태감, 두통, 마비감, 드물게 가볍고 일시적인 나른함, 피로, 어지러움, 두중감, 흥분이 나타날 수 있다.

2) 소화기계: 때때로 구갈, 구순건조감, 구역, 식욕부진, 위부불쾌, 소화불량, 복통, 위통, 복부불쾌감, 드물게 구토, 위장장애, 설사, 구순염, 미각이상이 나타날 수 있다.

3) 순환기계: 드물게 빈맥, 부정맥, 혈압상승, 때때로 심계항진이 나타날 수 있다.

4) 혈액계: 혈관염, 때때로 백혈구감소, 호중구감소, 임파구증가, 호산구증가, 드물게 단핵구증가, 혈소판증가, 혈소판감소가 나타날 수 있다.

5) 과민증: 광과민증, 아나필락시스 쇽, 때때로 부종, 드물게 발진, 소양감, 혈관부종이 나타날 수 있다.

6) 눈: 드물게 시야흐림, 결막충혈이 나타날 수 있다.

7) 간: 때때로 AST, ALT, Al-P, 총빌리루빈의 상승이 나타날 수 있다.

8) 신장: 때때로 BUN 상승, 당뇨, 요잠혈이 나타날 수 있다.

9) 기타: 인두염, 기침, 비출혈, 기관지경련, 청력이상, 시각이상, 때때로 흉통, 드물게 월경불순, 이명이 나타날 수 있다.

10) 1세 이상 6세 미만의 소아에 대한 임상시험 결과, 가장 흔하게 나타난 이상반응은 발열, 설사, 구토, 중이염이었다.

11) 시판 후, 공격성, 환각, 우울, 경련, 지각이상, 호흡곤란, 두드러기, 고정약물발진, 시각장애, 간염, 근육통, 체중증가, 식욕증가, 불면, 자살관념, 현기증, 실신, 진전, 미각이상, 배뇨장애, 요저류, 부종이 추가로 보고되었다.

-드러그인포 참조


진해거담제인 코대원포르테도 용혈성빈혈, 혈소판 감소, 재생불량성빈혈, 무과립구증의 부작용이 있다.


이것으로 유추하면 이 약들이 혈액성분을 파괴하면서(특히 혈소판에 영향을 주면서) 코피를 쏟게 한 것으로 추정된다. 복용을 중단해보라고 하고 간단히 치료해주고 보냈더니, 다음날 코피 안흘리고 좋은 컨디션으로 등교했다고 그 부모님한테 문자가 왔다.


작용action과 반작용reaction이라는 말은 일반적으로는 물리학에 쓰이지만 우리가 어떤 문제를 다루는 방식을 묘사할 때도 쓴다. '반작용'은 주어진 결과에 대하여 그저 반발하고 억제하는 것이며, '작용'은 원인이 되는 조건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진정한 변화를 유도하는 것이다. 반작용은 여전히 주어진 조건에 휘둘리는데 반하여, 작용은 그 조건으로부터 독립적이다. 반작용은 그 조건이 만들어진 근본원인을 보지 않고 그저 그 조건이 만들어낸 결과를 억제하기에 '형태만 바꾼, 본질적으로는 같은 문제'에 다시 맞닿뜨리게 된다. 그런 의미에서 반작용은 여전히 그 주어진 조건에 갇혀 있다.


위에서 한 어린이에게 투여된 약물은 히스타민 반응은 억제하였으나 그 과정에서 '혈소판 감소로 인한 출혈'이라는 다른 문제를 낳았다. 이것은 반작용이다. 이런 식으로는 치료가 되지 않는다. 이 아이가 이 약을 계속 복용했다면 그 부작용으로 미루어볼 때 혈액성분이 파괴되면서 백혈병이나 재생불량성빈혈에 걸렸을 수도 있다. 감기 치료하려다가 백혈병에 걸리면 빈대 하나 잡으려다 초가삼간 태우는 격 아닌가! 하지만 이런 케이스는 허다할 것이다. 의료소비자와 공급자의 정보격차 때문에 노출되지 않고 있을 뿐이다. 히스타민 반응은 그저 아이가 제 체질에 맞지 않는 것을 섭취할 때 나오는 방어반응인데, 체질에 맞지 않는 것을 중단시키지 않고 그 방어반응만 멈출 때 위와 같은 부작용을 초래할 수 있다.


우리가 병 또는 증세라고 보는 것들은 그 나름의 합리성을 갖고 있다. 몸이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의도에서 그러한 증세가 나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누가 감기에 걸렸다고 하자. 찬바람을 맞으면 체온저하를 막으려고 근육이 수축해서 찬공기에 닿는 표면적을 줄인다. 그 결과 환자는 근육통에 시달린다. 몸이 차가우니까 냉기에 대항하여 더 많은 열을 온몸에 공급해주려고 심장의 펌핑을 더 강하게 해준다. 그 결과 열이 동반된다. 찬 공기에 노출된 머리·얼굴·비강·인후부 등에는 특히 더 많은 열을 공급하게 된다. 그 결과 그곳이 열나고 붓고 발적된다. 비강은 차고 건조한 공기로부터 그 점막을 보호하려고 점액(콧물)을 분비하는데 인후부에 열이 몰려서 체액이 엉키면 그 체액(가래)을 뱉어내려고 기침을 한다. 이렇듯 몸은 외부환경의 변화에 대하여 그저 수동적인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 몸은 그에 대하여 되먹임을 준다. 따라서 우리가 소위 '병리pathology'라고 부르는 것들은 결국 몸의 방어메커니즘이다. 그 본질을 살피면 그렇다는 것이다. 하지만 의학은 아직 그 의도를 완전히 읽어내지 못하기 때문에 그것을 '그저 나쁜 것'으로 보아 억제하고 그 증세를 일으킨다고 여겨지는 미생물을 죽이는데 급급하다. 그 결과 증세는 사라졌는데 다른 부작용이 나오거나 장기적으로 몸이 더 약해진다. 몸의 자기보호 기능이 무장해제된 것이므로 당연한 귀결이다. 항생제,항히스타민제,엔세이드,스테로이드,신경안정제 등은 몸의 의도를 이해하기보다 그저 눈앞의 증상을 멈추는 것에 초점을 맞춘다. 이런 조치들은 일시적으로만 유효하며 장기적으로는 그 사람의 정기를 소모시킨다. 항생제는 슈퍼박테리아를 낳았다. 항히스타민제는 작은 알러지 반응을 크게 확장시켰다. 엔세이드는 혈액 성분을 파괴했다. 스테로이드는 부신을 무능하게 만들었다. 신경안정제는 자살충동과 폭력성향을 증가시켰다. 이 모든 사태 앞에 의학은 무력하다. 많은 것들을 할 수 있다고 약속했지만 그러한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인간 수명의 연장은 (응급의학을 제외하면) 의학보다는 생활수준의 개선이나 위생적인 라이프스타일에 돌려야 할 것이다.


물론 질병에 대한 이러한 인식이 '증세를 방임해야 한다'는 결론으로 이어져서는 안될 것이다. 개입을 하되 근본적인 원인을 바로잡아야 한다는 것이다. 위의 예에서 몸을 따뜻하게 만들어주면 체온저하를 막으려고 근육이 수축해서 찬공기에 닿는 표면적을 줄일 까닭이 없을 것 아닌가? 따라서 감기몸살로 오는 근육통이 사라질 것이다. 몸이 이미 따뜻하면 더 많은 열을 온몸에 공급해줄 필요도 없으니 심장의 펌핑이 안정될 것 아닌가? 그러므로 열은 내릴 것이다. 그리고 찬 공기에 노출된 머리·얼굴·비강·인후부 등에 더 많은 열을 공급할 필요가 없으니 그곳이 열나고 부을 일도 없을 것 아닌가? 호흡기에 닿는 공기를 따뜻하고 습윤하게 만들어준다면 비강은 차고 건조한 공기로부터 그 점막을 보호하려고 점액(콧물)을 분비할 까닭도 없고, 열로 그 체액이 엉키면서 그 체액(가래)을 뱉어내려고 기침을 할 필요도 없을 것 아닌가? 의료가 몸에 개입할 때에도 이렇게 몸의 되먹임을 고려하여야만 그 효과가 상쇄되거나 부작용을 낳지 않고 몸을 치유할 수 있다. 이런 되먹임을 고려하지 않으면 일시적으로 증상은 완화될 수 있을지언정 다른 증상들을 불러올 것이다.


'반작용의 의학'은 몸의 되먹임을 그저 억제할 뿐이며 '작용의 의학'은 몸의 되먹임을 이해하여 그 수고를 덜어주는 의학이다. 그리고 우리가 추구해야 하는 것은 후자다.


반작용보다는 작용이 나은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이것은 쉽지 않다. 예들 들어 감기에 걸렸을 때 몸을 따뜻하게 만들어주거나 기관지 점막을 습윤하게 만드는 한방약이나 치료혈은 종류가 매우 다양한데, 환자의 체질에 따라 맞는 약처방과 침처방이 다르기 때문이다. 이런 점은 동무 이제마와 동호 권도원에 의해 연구되었으나, 기존 한의학은 체질이라는 개념을 치료에서 반드시 고려하여야 하는 필수요소로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한의학의 한 분파 정도로 보는 실정이다. 여기에는 몇 가지 현실적인 이유가 있다. 일단 체질을 정확히 감별하기가 쉽지 않다. 체질을 진단하는 여러 가지 임상기법이 개발되었으나 난해하며, 기계로 진단하는 것은 아직 멀기만 하다. 그래서 이 작업은 결국 치료자의 경험과 직관에 상당 부분 의존한다. 필자는 2003년에 한의사 면허를 얻어 14년 넘게 체질의학으로 진료하고 있다. 처음 시작할 때보다 진찰이 정확해지고 있으나 지금도 가끔 잘못 볼 때가 있다. 체질의학을 하는 한의사들 대부분이 이런 오진의 가능성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그래서 체질을 잘못 감별할 가능성을 염두해두고 진료에 임해야 한다. 처음부터 환자의 체질을 정확히 판단하여 침을 시술하면 문제가 없지만 그렇지 않을 때도 있고, 그러면 침몸살이나 부작용이 나오기 때문에 그 결과를 보고 최초의 진단을 보정해가면서 환자의 체질을 파악하게 된다. 이런 진단 및 치료상의 어려움이나 수고로움 때문에 체질이라는 개념을 치료에 적용하는 한의사는 소수이며, 이런 길을 걷지 않는 보통 한의사들이 사용하는 처방은 자연스럽게 여러 체질에 사용하는 약재와 혈자리를 두루뭉실하게 조합하여 그 부작용을 줄이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되었으니 이것은 필연적으로 체질치료의 예리한 효과마저 깎아먹게 된 것이다.


체질이라는 개념을 치료에 적용하지 않으면서 한의학이 직면하게 된 또 한가지 문제는 의학연구방법이다. 최근 EBM이 대두되는데, 요새 한의학계도 이런 연구방법에 끌려가는 느낌이다. 서양의학에서는 EBM을 자기들의 과학적인 측면을 어필하는 도구로 삼고 있으나 EBM은 사실 서양의학에서도 그 개념을 도입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이다. EBM은 evidence based medicine의 약자다. 소위 '근거에 바탕을 둔 의학'이라는 것인데 듣기에는 그럴듯하나 문제는 무엇을 '근거'로 보냐는 것이다. EBM이 말하는 근거는 '통계적 근거'다. EBM은 근거제시 능력의 강도에 따라 근거를 다음과 같이 분류한다.

1. 무작위 할당 대조군 임상시험

2. 비무작위 할당 대조군 임상시험

3. 분석적 관찰연구

4. 다시점 장소비교연구, 비대조군 실험연구

5. 전문가 의견, 기술적 질병발생연구, 단일증례보고, 증례종합보고

EBM은 일반적으로 이 가운데 1을 근거제시능력이 가장 뛰어나다고 보고 5를 가장 약하다고 본다. 그러나 무작위 할당 대조군 임상시험을 통하여 얻은 결과를 실제 치료에서 개별환자에게 적용하려면 그 환자가 무작위 할당 대조군 임상시험에 참여한 사람들과 같은 조건(체질)이어야 한다. 만일 다르다면 임상시험 결과를 실제 치료에 적용할 수 없으며, 그것은 임상시험 참가자에게는 긍정적 효과가 있었지만 그 요법을 적용하는 환자에게는 치명적인 부작용을 낳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제로 외국 임상시험에서는 별 부작용을 보이지 않던 것이 국내에 약을 도입한 다음에 엄청난 부작용을 낳아 논란이 된 약물이 있다. 타미플루가 그런 경우다. 임상시험 참가자 대다수의 체질과 치료하려는 환자의 체질이 다를 때 이런 괴리가 생긴다. 필자가 기억하기로는 그 약을 개발한 회사는 스위스의 로슈인데, 아마도 스위스 국민이나 유럽인들을 대상으로 임상시험을 진행했을 것이고, 이것을 체질분포적으로 이질적인 집단이 되는 일본인이나 한국인에 적용했을 때 부작용이 속출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 때문에 의학은 EBM(evidence based medicine)이 아니라 CBM(constitution based medicine)을 추구해야 한다. 근거evidence가 환자의 체질constitution에 따라 다른 의미를 가진다면, 근거가 아니라 체질을 중심에 놓고 의학을 재구성해나가야 하는 것이다.

의학이 지금 EBM을 추구하려는 유혹을 받는 것은 EBM이 옳기 때문이 아니라 CBM이 어렵기 때문이다. 개별 환자의 체질을 파악하는 게 어렵기 때문에 여러 사람에게 두루 투여할 때 확률적으로 가장 부작용이 덜한 처방을 찾으려고 EBM을 하는 것이다. 즉 CBM의 부재를 EBM으로 보상하려는 것이다.

EBM은 쉽다. EBM은 통계적 근거로 치료하면서 치료의 실패나 실수 또는 한계에 대하여 확실한 면죄부를 받는다. 눈 앞의 환자 체질이 무엇이든지 같은 약을 쓰고 부작용이 나면 '통계적으로 이 약이 가장 효과가 좋아서 이 약을 선택한 것이며 부작용이 난 건 환자 당신이 특이체질이었기 때문'이라는 말로 둘러댈 수 있다. (이 면죄부는 의료인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편리한 것이다)

그러나 CBM은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CBM이 체계적으로 구성되려면 환자 한 명 한 명의 삶에 밀착하여 세심하게 관찰하고, 임상적 가설을 세우고, 치료를 통하여 그 가설을 검증하고, 거기서 나온 잠정적 결론을 다시 비슷한 특징을 보이는 다른 환자에 일일히 대입해봐야 한다. 이 작업을 반복하면서 체질을 결정짓는 단서를 추정하고 발견하고, 체질을 묘사하는 어떤 전체적인 그림象을 얻어야 한다. 그리고 이 단서와 그림을 다른 의사들과 공유하여 그 맥락을 다시 검증하고, 정립된 개념으로 구체화하고 확장해야 한다. 이것은 매우 긴 시간이 필요하고 엄청난 인내심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당연히 한 세대에서 결론이 나는 문제가 아니다. 다행히도 한의학은 사상의학과 8체질의학을 통하여 이런 노력과 실용적인 성과가 어느 정도 축적된 상태다. 그러나 이것을 개별 한의사들이 다시 체득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다. 그것은 시간이 걸릴 수 밖에 없다. 이제마와 권도원이 이룬 체계를 임상의들이 제대로 적용하려면 체질적인 특징을 포착하고, 올바른 처방을 선택하고, 그 처방을 실수없이 시술하기 위하여 충분한 시행착오를 겪어야 한다. 이 길은 매우 좁은 길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는 것보다는 쉬울지 모르나 수없이 많은 시행착오로 치료자 스스로 좌절을 거듭해야 한다. 따라서 임상의들은 이런 험난한 길보다는 루틴처방을 날리면서 쉬운 길, 편한 길을 택한다. 따라서 한의학은 EBM으로 질질 끌려가고 있는 것이다.

CBM은 그 사람의 체질에 주목하여 음식,주거,운동,목욕습관,직업 등을 그가 선천적으로 타고난 조건에 맞추어 애초에 병들지 않게 예방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소위 체질에 맞는 섭생 또는 양생이라고 하는 '라이프스타일 의료'다. 이런 의학은 필연적으로 개인에 대한 섬세하고 예리한 관찰이 필요하므로 '군중을 위한 의학'이 아니라 '개인을 위한 의학'으로 출발한다. 공장에서 찍어내는 기성복 같은 의학이 아니라 한 사람 한 사람을 위한 맞춤의학이다. 이런 의학은 대규모 실험을 통한 통계적 근거를 수집하는 것으로는 결코 발달할 수가 없다. 오직 개개인을 섬세하게 관찰한 결과에서 나올 수 있는 의학이다. 이런 의학에서는 증례보고가 (체질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제공해줄 수 있다는 측면에서) 대규모 실험보다 훨씬 더 중요하게 취급될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증례를 보고하는 의사들의 분산화된 네트워크에서 사람의 체질의 생리 및 병리에 대한 지식을 조심스럽게 갱신하는 것이다. EBM이 실험을 통해 조급하게 어떤 불완전한 결론(이 결론은 나중에 다른 실험에 의해 전복되는 경향이 있다)에 도달해버리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CBM 연구는 아주 느린 속도로 그러나 정확하게 확실한 참에 점점 수렴하게 될 것이다. 그 과정에서 개인환자의 특질들이 무시되지 않고 신중하게 고려되기 때문에 이것이 더 나은 방향이다. 이러한 접근방법에서 의학은 개인에서 군중으로 나아간다. 반면에 EBM은 군중에서 개인으로 나아가려고 한다. 그러나 군중에게 일률적으로 하나의 처방을 적용할 수는 없기 때문에 그것이 개인으로 나아갈 때 반드시 개인의 체질과 괴리를 낳는다. 어떤 약을 군중에게 투여할 때 50퍼센트는 증상이 사라지고, 40퍼센트는 부작용을 낳고, 10퍼센트는 치명적인 부작용으로 죽을 수 있다면 그 약을 써야 할까? EBM은 그것을 허용한다. 하지만 CBM은 그렇게 하지 않고 그 10퍼센트마저도 살리려고 한다. 아니 그 100퍼센트가 애초에 병들지 않게 하는 것이 CBM의 궁극적인 목표다. CBM은 개인에서 출발하여 군중으로 나아가므로 EBM이 맞닿뜨리는 문제는 원천적으로 예방된다.

한의학이 양의학처럼 EBM의 길을 걷는다면 EBM의 한계를 고스란히 지게 될 것이다. EBM이 극복하지 못한 질병의 난치병화, 약물중독의 문제를 들여다보면 그게 최선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CBM은 EBM과 다른 발전 모델이 필요하다. EBM의 목표는 통계적 근거를 수집하는 것이므로 이것을 위하여 중앙에서 거대한 규모의 임상시험을 하고 거기서 나온 결론을 각 의료기관에 보급한다. 따라서 EBM의 발전은 이 중앙의 덩치를 얼마나 더 키울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여기에는 막대한 자본이 필요하다. 반면에 CBM의 목표는 개별 환자의 정확한 체질을 파악하고 그에 맞는 맞춤처방을 제공하는 것이므로 각 의료기관이 개별환자의 증세와 생활을 밀착하여 관찰하고 거기서 병리를 추론하고 개인이 실천할 수 있는 실용적인 해법을 제시하게 된다. 여기에 필요한 것은 막대한 자본이 아니라 여러 의료기관의 긴밀한 네트워크가 만들어내는 유기적인 집단지성이다. 이 집단지성이 수행해야 할 작업은 환자의 증세 뿐 아니라 환자 자체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은 '환자 체질에 대한 일종의 정교한 드로잉'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환자가 어떤 증세를 자주 보이는가? 그 환자의 신체와 심리의 특징은 무엇인가? 그 환자가 자기 증세를 호소할 때 그 내용 뿐 아니라 그 환자 목소리의 특징에도 귀기울여야 한다. 그리하여 '이런 증세에 이런 약을 쓴다'는 식이 아니라 '이런 타입의 환자의 이런 증세에 이런 처방이 잘 듣는다'라고 하는 부분을 점점 정교하게 그려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에게 잘 들었던 처방의 성격을 미루어 다시 환자의 병리를 더 깊이 이해할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임상의는 환자의 체질을 결정하고 구분지을 수 있는 요소들을 추론해내야 한다.

CBM은 환자를 어떤 기준으로 분류하느냐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가 될 수 있다. 임상의는 이런 여러 가지 이론의 비교우위를 판단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비교우위를 판단하기 전에 먼저 각 이론이 무엇을 묘사하는지 정확히 파악하고 접점을 찾아야 한다. 무조건 '저것은 틀리고 이것이 맞다'고 성급하게 단정할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언어가 가리키는 맥락을 정확히 이해하고 자기 이론과의 접점을 찾아서 그것으로 외연을 확장해야 한다.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은 나의 적이 아니라 벗이다. 그 다름을 통해서 더 넉넉해질 수 있다. 필자는 CBM이 EBM보다 중요하게 다뤄질 때가 올 것이라 믿는다. CBM의 강력함은 무엇보다 치료의 성과로 드러나게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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