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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케토시스

40대 남성이 진료실로 들어왔다. 작년 가을부터 갈증이 나고 체력이 떨어졌으며 두 달 전부터는 소변을 참기 어려워졌다는 것. 알칼리수를 마시니 증세가 조금 가벼워졌으나 결국 공복혈당이 600mg/dl을 넘어가면서, 즉 혈당측정기의 측정 범위를 넘어버리면서 당뇨병으로 진단되어 어느 병원에서 슈가메트서방정과 글리메정을 처방받았다. 약을 먹으면 평생 먹어야 할 것 같아서 다른 방법을 찾아보려고 왔다는 것.

이 환자는 90년대 말 서울의 모 한의원에서 토양체질로 감별됐고 다른 한의원에서는 목양체질로 감별됐다. 그리고 2000년 초 부산의 모 한의원에서는 목양체질로 감별되었다. '체질을 감별받았지만 체질식은 안하고 있다. 예전에 체질감별을 받을 때는 체질침 반응을 확인하지 않았다'고 하여 "체질침 반응을 확인하지 않으면 체질감별이 정확하지 않을 수도 있다. 체질을 먼저 정확히 감별해야 치료가 된다"고 알려주었다.

감별해보니 목양체질이다. 체질침을 시술하면서 '체질식을 하되 탄수화물 섭취를 줄이고 지방을 많이 섭취하라'고 알려주었다. 이른바 저탄고지(低炭高脂)다. 

목양체질의 당뇨는 간과 폐의 부조화 상태다. 간기능이 지나치게 항진되면서 간에 저장된 글리코겐이 당으로 변환되어 혈액 속에 넘쳐나고 폐기능은 떨어져서 넘치는 당을 소모시키지 못한다. 체질에 해로운 생활습관, 특히 탄수화물 과잉 섭취가 원인이다. 

필자는 이 분에게 밥을 절반으로 줄이고 다른 탄수화물은 모두 섭취 중지하라고 권고했다. 그러자 1주일 만에 갈증과 소변을 참기 어려운 증세가 사라졌다. 피로감은 남아있으나 처음보다 개선되었다. 

다갈, 다음, 다뇨는 당뇨병의 3대 증상이다. 그런데 이 증상들은 사실 몸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서 나타난다. 혈액을 오염시키고 있는 당독을 씻어내는 자구책인 셈이다. 그래서 이런 증상이 있을 때는 당 자체를 더 공급하지 말아야 한다. 체질식을 하되 저탄고지를 하면 혈당이 더 늘어나지 않고 이미 혈액에 녹아있는 당은 몸의 치유 메커니즘에 의해 씻겨나간다. 그러면 당독이 줄었으므로 갈증도 줄어든다. 갈증이 줄면 물 섭취량도 자연스레 줄어들고, 소변 보는 횟수도 줄어든다.  

기존 의료는 다갈 다음 다뇨, 이 3대 증상을 문제로만 보아서 그 증세가 나오지 않게 하는데 주력하지만 사실 이 증상들은 원인이 아니라 당의 과다섭취로 인한 결과다. 결과만 억제하면, 겉으로는 혈당을 정상수치로 유지하고 있을지라도 그 약물 복용을 중지할 때 병의 본 모습, 즉 고혈당으로 돌아온다. 약물요법으로 평생 버틸 수 있는 것도 아니다. 당장 증세가 나오지 않을 뿐이지 시간을 끌수록 잠재적으로는 고혈당이 악화되는 것과 같아서 반드시 합병증이 따라온다. ('합병증을 막기 위해서 혈당을 잘 관리하세요'라는 조언은 분명히 옳지만 그 혈당조절은 약물이 아니라 식이요법으로 해야 한다)

치료 2주차에 이 환자의 피로감은 처음 상태를 10 이라고 할 때 4 정도로 줄었다. "예전 피로할 때는 손가락 지문 있는 곳이 트곤 했는데 지금은 괜찮아졌다"고 하였다. 호전 반응이 온몸으로 나오고 있었다. 하지만 '방심하지 마시라'고 얘기해두었다. 어느 정도 호전될 때 가장 방심하기 쉽다. 그러면 다 된 밥에 재 뿌리는 일이 될 수 있다. 이 때 공복혈당은 350이었다. 600 이상이었다가 350으로 내려왔으니 절반 가까이 나은 셈이다. 그래도 여전히 높다. '계속 체질식으로 저탄고지 하라'고 권고했다.

그로부터 일주일 뒤 환자분이 "설날이라 탄수화물을 과식했다"고 털어놓길래 주의를 당부했다. 그리고 다시 일주일 뒤 "밥을 절반만 먹고 있는데 허기진다"고 하여 '대신 육류와 유제품를 충분히 섭취하시라'고 했다. 

치료 32일차에 공복혈당이 343이 나오길래, 2주안에 300 이하로 가보자고 독려했다. 이틀 후 다시 공복혈당을 쟀는데 298이 나왔다. 이 때 환자는 "클라이밍을 배우고 있다"고 하였다. 체력소모가 많을 듯 하여 '너무 무리하지 마시라'고 했다. 2주 안에 280 이하로 가보자고 독려했다. 

5일 후 다시 내원한 환자는 혈당에 약간 기복이 있었지만 그 주 토요일 공복혈당 276을 찍었다. 그 다음 2주 동안은 오르락 내리락 하며 기복이 있다가 밤 늦게까지 일하면서 혈당이 조금 올라갔다. 잠을 안자면 부신피질 호르몬인 코티솔이 증가하면서 혈당을 끌어올리므로 "충분히 수면시간을 확보해야 혈당이 더 떨어질 수 있다"고 알려드렸다. 이 부분에서는 어려운 점이 있었다. 이 분이 편의점에서 야간근무를 해야 했기 때문에 규칙적으로 수면시간을 맞추기 어려웠다.

다시 4일 후 내원했는데 "그 전에 변비가 있었는데 요즘은 사라졌다"고 하였다. 그리고 "안경이 안맞는 것 같아서 안경점에 가서 시력검사를 해보았는데 시력이 좋아졌다는 얘기를 듣고 왔다"고 했다. 전체적으로 경과가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공복혈당이 270 이하로 내려가는 것이 참 어려웠다. 벽에 부딪힌 느낌이 들었다. 20일 정도 더 치료하다가 환자분이 "어디로 놀러갔다가 거기서 그냥 막 먹었다"고 털어놓았다. 그리고 두 달 만에 내원한 환자는 "다시 갈증이 난다"고 하였다.

대사증후군 환자분들을 치료하다보면 마치 로키를 트레이닝시키는 체육관 관장이 된 것 같은 기분이 들 때가 있다. 유망한 선수의 영광과 좌절을 옆에서 계속 지켜보는 것처럼, 환자의 호전과 악화를 보면 심리적인 동조 현상이 일어난다. 환자가 좋아지면 필자도 기분이 좋아진다. 마음 속에서는 "좀 더, 좀 더"라고 채근한다. 환자한테 "좋아지고 있으니 조금만 더 노력해보자"고 얘기한다. 하지만 오래된 식습관의 벽은 얼마나 뛰어넘기 힘든가!

'히말라야 정상을 정복하는 것보다 자기 자신을 정복하는 것이 어렵다'고 한다. 환자의 머리 속에서는 과거에 탐닉했던 쾌락의 감각들이 계속 되풀이되어 연주된다. 그 감각이 스스로를 망치고 있음을 머리로 알더라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모든 증세들은 일종의 중독적인 양태를 띠고 있다. 체질에 해로운 음식들은 미묘한 결핍을 자아낸다. 이 결핍, 완전히 채워지지 않는 빈 틈이 블랙홀처럼 훨씬 나쁜 것들을 자기 삶으로 초대한다. 체질에 맞는 것을 충분히 채워줌으로써 그런 결핍을 최소화할 수 있고 오래된 중독에서 벗어날 수 있다. 그런 채움 없이 비우려고만 한다면 결국 반동이 일어난다. 기갈은 점점 다급해지고 중독은 깊어진다. 그래서 금욕과 중독은 양 극단에 있지만 한 얼굴의 다른 표정과 같다. 환자는 금욕과 중독을 시계추처럼 왔다 갔다 한다. 그 진폭을 줄여서 중도를 얻어야 한다. 중도는 금욕이나 중독과 다른 차원이다. 이미 채워졌기 때문에 더 찾지 않는 상태다.

체질을 정확히 감별하여, 체질식을 하고 체질침이나 체질약을 쓰면 초반에 증세가 급격히 가벼워진다. 이 때 환자는 조금만 치료 더하면 다 나을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 마음을 놓게 된다. 처음에 타이트하게 지키던 체질식도 슬슬 흔들린다. '조금이니까 괜찮겠지', '이걸 다 참으면 무슨 재미로 사나', 자기합리화의 목소리가 마음을 간지럽히고 결국 본인 체질에 해로운 음식을 조금씩 먹게 된다. 그렇게 하더라도 체질침이나 체질약의 효과가 환자의 몸에 계속 가해지고 있기 때문에 처음에는 티가 나지 않는다. 치료 효과는 그대로 나오거나 효과가 처음처럼 드라마틱하게 나오지 않더라도 예전처럼 크게 악화되지는 않는 것 같아서 환자는 '언젠가는 낫겠지' 하며 점점 더 많이 체질식을 어기게 된다. 그러면서 예전의 증세들도 시나브로 하나 둘 돌아온다. 이 때 환자는 치료자에게 묻는다. '처음에는 효과가 빨리 나오는 것 같던데 왜 지금은 낫지 않나요?' 그러면 필자는 되묻는다. "체질식을 잘 하고 계신가요?" 환자는 뜨끔한다. 어느 분은 솔직하게 "실은 요 며칠 좀 안 지켰어요"라고 털어놓고, 어느 분은 '그게 뭐 대수라고 그럴까?' 싶어 "잘 지키고 있어요"라고 거짓말을 한다. 환자가 체질식을 안지켰다고 솔직하게 고백하면 다행이다. 다시 지키고, 더 잘 지킬 수 있는 방법을 함께 고민해보면 되니까. 하지만 여기서 환자가 거짓말을 하면 치료자는 치료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다른 요소가 없었는지 처음부터 재검토해야 한다. 체질이 잘못 감별되었나? 처방을 잘못 선택했나? 그렇다면 처음에 나왔던 드라마틱한 효과들이 설명이 안되는데? 이렇게 치료에 혼란이 찾아온다.

임상적으로, 체질을 정확히 감별 후 체질침이나 체질약을 사용하여 증상의 50%를 날려버렸다면 그 치료 방향은 옳다. 그 때는 잠시 추춤하더라도 같은 처방으로 계속 밀고 가서 끝을 봐야 한다. 중간에 환자가 방심하여 치료 효과가 처음보다 느려지더라도 의심과 회의를 거두고 좀 더 긴 호흡으로 치료를 해야 한다.

혈당이 600에서 270으로 떨어졌으면 270에서 정상 혈당치로도 떨어질 수 있다. 600에서 270으로 오는 도중 전신적인 호전의 징후들이 관찰되었으면 270에서 125로 가는 과정도 안전할 것이라는 임상적인 추론이 가능해진다.

다만 600에서 270으로 가는 속도와 270에서 125로 가는 속도는 다를 수 밖게 없다. 기타를 튜닝할 때 음의 이탈이 심한 처음 상태로부터 대략 음이 맞추어지는 지점까지는 줄감개를 한 번에 많이 돌릴 수 있다. 하지만 그 다음, 아주 정확하게 음이 맞추어지는 균형점까지는 조심스럽게 천천히 조금씩 돌려야 한다. 미세조정의 단계란 그런 것이다. 600에서 270으로 갈 때보다 270에서 125로 가는 것이 훨씬 험난할 수 있다. 생활습관의 전면 재조정이 필요하고, 어떤 경우에는 근무시간이나 직업을 바꿔야 할 수도 있으며, 심지어 인간관계를 정리해야 할 수도 있다. 여기서 환자는 본인의 인생을 원점에서 재검토해야 한다. 삶의 우선 순위를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건강해져서 몸의 고통에서 벗어나서 새 삶을 사는 게 중요한지, 자기를 병들게 하는(당을 많이 섭취하도록 하는) 어떤 직업적인 조건, 어떤 사람들과의 모임이 중요한지. 만일 그 모임, 그 관계를 유지하면서 체질식을 할 수 있으면 상관이 없다. 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환자가 체질식을 하면 옆에서 핀잔을 주고 비아냥거리며 '골고루 먹어야 한다'는 사회의 일반적인 통념으로 괴롭힐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스스로 얼마나 폭력적인지 잘 알지 못한다. '그래, 600에서 300으로 떨어졌다고? 잘됐네. 열심히 해서 더 건강해졌으면 좋겠네"라고 격려하는 것이 아니라 '뭘 그렇게 가려 먹냐? 남자답지 않게' 라든지, '그러다가 영양실조 걸릴 거야'(당뇨는 영양과잉으로 온 것임에도)라는 악담을 마구 퍼붓는다. 모두가 똑같지 않으면 어딘가 불편해지는 걸까? 서로의 차이나 다양성을 존중하지 못한다면 가장 가까운 관계가 건강에 가장 해로운 관계가 될 수도 있다. 
 
체질식을 하되 저탄고지를 하면 당질대사를 휴식시키고 지질대사를 촉진하게 된다. 당이라는 연료는 인슐린 저항이나 인슐린 부족으로 흡수가 잘 안되니 대신 몸의 지방을 태워서 케톤체를 만들고 그것을 연료로 몸의 대사를 유지하는 것이다. 이것을 케토시스ketosis라고 한다. 환자가 이 상태로 갈아타는데 성공하면 혈당은 줄어들고 동시에 인슐린 저항이 개선된다.

이것은 목양체질의 당뇨 치료시 반드시 거쳐야 하는 자연스러운 변화다. (뛰어난 운동선수들 중에는 케토시스를 유지하는 사람들이 많으며 케토시스 상태에서는 몸무게가 쉽게 불지 않는다)

케토시스와 함께 살펴보아야 하는 것이 케톤산혈증ketoacidosis이다. 케톤산혈증은 케톤체가 혈액 안에서 많이 늘어날 때 혈액이 산성화되는 것을 의미한다. 복통과 구토를 유발하며 호흡에서 과일향이 나거나 호흡이 아주 깊어지고 느려지는 등 응급을 요한다.

지금까지의 당뇨 치료는 케토시스와 케톤산혈증을 구별하지 못했다. 이 두 상태는 비슷하게 보이지만 분명히 다르다. 둘 다 케톤체가 발생하지만 케토시스는 건강한 상태 또는 건강으로 나아가는 상태라고 할 수 있고 케톤산혈증은 그 반대 방향으로 가는 상태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점은 어떤 조건에서 케토시스가 되고 어떤 조건에서 케톤산혈증이 되는지 아는 것이다. 케톤체가 늘어난다고 혈액이 반드시 산성화되는 것이 아니다. 혈액이 산성화되는 진짜 원인은 늘어난 케톤체를 처리하거나 그것의 영향을 중화할 수 있는 능력이 떨어졌기 때문이다. 목양체질은 폐가 약하게 타고나는데 당뇨병에 걸리면 약한 폐가 더 약해져서, 케톤체 때문에 늘어나는 혈중 이산화탄소를 처리하는 기능이 떨어진다. 따라서 혈액이 산성화되기 쉽다.

바로 이 점 때문에 당뇨병으로 진단 받은 다음 가능한 빨리 근본 치료를 들어가야 한다. 체질식을 안하고 약물에만 의존하면 내부장기의 균형은 점점 무너져간다. 그러면 나중에 케토시스로 넘어가고 싶어도 산혈증이 발목을 잡는다.

체질식을 하면 내부장기의 적불균형을 유지할 수 있고(목양체질의 경우 간과 폐의 부조화를 견제할 수 있고) 따라서 혈액 산성화의 부작용을 겪지 않고 안전하게 케토시스 상태로 나아갈 수 있다. 즉 케톤산혈증이 오는 원인은 지질대사로 대체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체질식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둘 다 혈당강하제를 복용하지 않지만 체질식 여부에 따라서 하나는 방임이 되고 또 하나는 근본치료가 된다. 이 차이를 알면 약물의 노예 신세에서 벗어날 수 있고 당뇨 합병증도 피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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