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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정확한 체질감별

8체질의학으로 진료를 하다보면 체질을 정확히 알기 위해 여러 한의원을 전전하는 분들을 가끔 만난다. 이 분들은 체질을 다른 곳에서 감별받았으나 스스로 그 체질임을 확신할 수 없어서 방황하는 것이다. 그 중 한 분이 기억나서 적어보려고 한다.


이 분은 40대 여성인데, 통통한 체형에 급한 성격, 말은 비교적 빠르게 하는 편이고 명랑하고 활달하며 적극적이었다. 이 분은 꽤 유명하다고 알려진 8체질한의원은 대부분 다 가봤으나 그곳에서 알려준 체질이 자신은 아닌 것 같다고 하였다. 정말 정확한 체질을 알고 싶어서 왔다는 것. 이런 경우 그 분이 혹시 그곳에서 알려준 체질식을 제대로 실천해보지도 않고 그 체질이 아닐 거라고 속단하는 것은 아닐까 한 번쯤 의심하게 되지만, 이 분의 경우는 그렇게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녀가 건넨 3장의 메모지 때문이었다. 거기에는 각각의 음식을 섭취했을 때의 반응들이 빼곡하게 적혀 있었다. 그녀는 자기 체질을 정확히 알기 위해 엄청난 노력을 퍼부었던 것이다. 그 분이 갔던 병원 원장님들이 알려준 체질식을 상당히 진지하게 실천해보았음에도 결과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체질이 잘못 감별되었을 거라고 믿고 있었던 것이다. 만일 여기서 필자가 체질을 잘못 감별한다면 이 분은 다시 체질을 알기 위한 멀고 먼 방황의 길을 떠나게 될 것이었다. 신중하게 접근해야 했다. 환자분께 "여기는 다른 한의원처럼 하루만에 체질을 감별하지 않는다. 빨리 감별하는 것보다 정확하게 감별하는 게 좋지 않느냐?"고 이야기했고 환자분도 동의했다.


어디가 불편한지 하나 하나 짚어보니 증상도 결코 가볍다고 볼 수 없었다. 위장에 궤양과 출혈이 있고, 방광염이 있는데 3주 전에 (현미경적  소견으로) 혈뇨가 있다는 얘기도 들었다. 하룻밤에 소변을 10번 정도 보러 간 지 2년째 되었고, 불면증에 신경이 예민하고, 생리통이 심한 편이라고 했다. 그리고 위장약을 복용중이었다.


또, 이 분은 자기가 지금까지 시술받은 체질침의 반응들을 모두 세세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금양체질 수음체질 목음체질에 해당되는 침을 맞았을 때 소변이 멈추었으나 수음체질 침을 맞을 때는 발열이 동반됐고 목음체질 침을 맞을 때는 두통이 동반됐다. 금음체질 침을 맞았을 때는 우울증과 폭력적인 성향과 분노가 치밀었고, 목양체질 침을 맞았을 때는 잠을 못자고 침이 흘렀다. 또 토양체질 침을 맞을 때는 입이 마르고 식욕이 떨어졌으며, 토음체질 침을 맞을 때는 잠은 잘잤으나 허벅지가 당겼다고 한다.


일단 이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부작용은 토양체질 침의 반응이었다. 이 분이 이야기에 따르면, "토양체질 침을 맞았을 때 신기하게도 입 안의 침이 모두 바짝 말라버렸다"고 했다. 일단 분명히 그러했는지 다시 확인할 필요가 있어서 환자분께 양해를 구하였다. "토양체질 침을 다시 시술해드릴 텐데 같은 부작용이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정확한 체질을 감별하려면 정답이 아닌 것을 하나 하나 배제해가야 한다." 다행히도 환자분이 이해해주셔서 토양체질 침을 시술했다. 그 다음날 상태를 물어보니 "역시 입안의 침이 다 말라버렸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두통·오심·피로·두근거림·불면·악몽 등의 증상이 동반됐다. 이 사실에서 필자는 두 가지를 추론해냈는데 그것은 "첫째, 이 환자는 토양체질이 아니다. 둘째, 이 환자는 토양체질과 장기의 강약배열이 반대에 가까운 체질일 것이다."였다. 침acupuncture의 작용으로 침amylase이 말라버렸다는 것은 소화계가 억제되었을 때 나오는 증상이다. 즉 췌장이나 위장이 약한 체질일 것으로 보았고, 그래서 토양체질과 정반대인 수양체질이라고 가정하고 수양체질 침을 시술해보았다. 그랬더니 침 시술 후 바로 두근거림이 멈추었다. 다음날 상태를 확인해보니 잠도 잘자고, 다른 모든 증상은 사라졌으며, 다만 속이 묵직하다고 한다. 한 번 더 같은 침으로 시술해보니 다음날은 속이 묵직한 건 풀렸고 트림만 나온다고 한다. 그리고 잠을 낮잠까지 합쳐서 총 10시간을 잤다고 한다. (평소에는 5시간을 잔다고 했다) 뿐만 아니라 밤에 소변보러 가는 증상이 2회로 줄었다. 치료방향이 올바르게 설정되었기 때문에 계속 같은 침처방으로 밀고 갔다. 환자분은 당시 올림픽 중계를 보려고 조금 늦게 잤는데도 불구하고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고 있다고 했다. 이 분의 재밌는 표현을 빌리면 "짐승처럼 잘 먹고 잘잤다"고 한다. 환자분이 체질에 맞는 약을 복용하고 싶다고 하여 췌장과 위장의 기능을  촉진하는 처방을 25일간 투여하면서 경과를 확인해보니 잠이 더 잘 와서 밤중에 화장실 가고 싶은 생각이 아예 안들고, 부종도 빠졌으며, 다시 건강검진을 받아보니 위장에 있던 궤양과 출혈은 모두 사라지고 미세한 염증만 5개의 포인트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2년 동안 고생한 병이 1달만에 나은 것이다. 이것은 무엇보다 체질이 정확히 감별됐고, 환자 스스로 체질식을 거의 완벽한 수준으로 실천하였기 때문에 가능한 결과다.

생각해보건대, 이 환자분이 거쳐간 다른 원장님들이 체질을 정확히 감별하지 못했던 이유는 아마 지나치게 서둘렀기 때문이 아닌가 싶다. 어떤 환자분들은 필자에게, 왜 진찰 후 바로 체질을 확진해주지 않느냐고 물어본다. 다른 8체질한의원에서는 초진에서 바로 체질을 확진한다는 것이다. 초진에서 바로 "당신은 OO체질입니다"라고 알려주는 것이 "체질을 감별하려면 좀 더 시간이 필요합니다"라고 말하는 것보다 믿음직스럽게 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만일 그렇게 해버리면 체질감별이 정확하게 안 될 가능성이 높아지고 그 사람은 잘못된 섭생을 하게 되어 오히려 건강을 잃게 되는 수도 있을 것이다. 따라서 체질감별시 애매할 때는 체질침을 시술하면서 최소 1주 정도의 경과는 확인해야 한다. 환자들도 어느 한의원에서 하루만에 체질을 감별해준다면 한 번쯤 틀릴 가능성을 염두해두면 좋을 것 같다. 체질감별은 빨리 하는 게 좋은 게 아니다. 멀리 돌아가는 길이 가장 빠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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