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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웰다잉

웰다잉well-dying이라는 말이 있다. 직역하면 "잘 죽는 것"이 되는데, 삶의 질을 강조하는 웰빙이 대두되면서 죽음의 질도 중요하다는 개념으로 나온 것이다. 특히 이 개념은 말기암환자가 무의미한 연명치료를 중지하고 사망할 때까지 좀 더 의미있게 삶을 마무리하고 사람답게 죽음을 맞이하게 하자는 호스피스의 취지와 맞물려 있는 것 같다. 취지는 좋은데, 웰다잉이라는 말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필자가 아는 웰다잉은 단 한 가지 밖에 없다. 바로 자연사自然死다. 병에 걸려서 죽는 것이 아니라 제 명대로 살다가 죽는 것, 천수를 다하는 것이다. 자연스러운 환경에서 살아가는 야생동물들은 다른 동물에게 먹히지 않는 한, 대부분 자연사를 한다. (근래 야생동물들이 병사를 하는 것은 인간이 그 살아가는 환경을 오염시켰기 때문이다.) 그럼 야생동물들은 왜 자연사를 하는가? 어떻게 천수를 다할 수 있는가? 제 몸에 맞는 먹이만 먹고 살기 때문이다. 호랑이는 배고프다고 풀을 뜯지 않는다. 소에게 다른 먹이를 안준다고 육식을 하진 않는다. 제 몸에 맞는 음식만 먹고 살아야 하는 자연의 이치에 순종하므로 건강을 유지하고 자연이 정해준 수명을 다하는 것. 오직 인간만이 남이 좋다고 하면 제 몸에 맞는지 안맞는지 살펴보지도 않고 다 먹고 탈이 난다. 사람마다 체질이 있다. 몸의 "다름"이 있다. 이 다름을 모르면 일상에서 섭취하는 평범한 음식조차 해를 주어 건강을 잃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대증요법이 결합하면 그 결과 암이 된다. 우리가 '병'이라고 부르는 현상은 유해한 환경에 대한 몸의 방어반응이다. 만일 그 유해한 환경(먹거리, 운동, 목욕습관, 직업, 활동 등)을 체질에 맞게 바로잡으면 방어반응이 나올 필요가 없기 때문에 병은 저절로 낫게 된다. 하지만 그런 조건을 바로잡지 않고 대증요법만 쓰면, 증상은 일시적으로 사라지지만 병은 낫지 않고 남게 된다. 나은 것처럼 보이지만 더 위험한 형태로 변형되는 것이다. 그러면 그에 대해 다시 또 다른 대증요법이 더하여지고 그렇게 하여 약이 약을 낳고 병이 병을 낳아 끝이 없게 된다. 소위 대증요법이란 것은 그 요법이 타겟으로 삼는 증상과 관련된 인체의 메커니즘 중 한 단락을 차단하여 그 증상이 일어나지 못하게 막는다. 하지만 몸은 대증요법으로 막힌 길을 피하고 우회로를 찾아서 그것이 원래 이루려고 하는 바를 다른 길로 이루게 된다. 그 길의 끝에 있는 것이 암이다. 그대로 두었다면 피부에 종기가 생기거나 적당히 통증이 생기다가 나을 것이 안으로 퍼져서 처치가 곤란해지는 것이다.


암은 그 단계를 1기 2기 3기 4기 식으로 나누는데, 일반적으로는 1기에서 3기는 비진행암, 즉 암세포가 한 장기에 고정되어 있고 다른 곳으로 옮겨가지 않은 상태이며, 이 경우는 수술로 절제하면 해결될 수도 있다. 하지만 4기부터는 진행암이라고 하며 암세포가 다른 장기로 전이된 것인데, 이 경우 수술 뿐 아니라 항암제로 나은 케이스는 없다. 낫는 것은 고사하고 수개월에서 1년 안에 대부분 사망한다. 환자가 교육을 많이 받든 무지한 사람이든, 병원에서 첨단장비로 무장한 집중치료실을 이용하든 말든, 항암제를 쓰든 말든 결국 다 죽어나간다는 얘기다. 이것이 말기암의 진짜 현실이다. 치료해도 낫지가 않으니 요즘은 완화요법이라고 하여 암 자체가 아니라 암 때문에 생기는 증상에 대해서만이라도 적극적으로 대증요법을 하고, 호스피스를 통하여 환자로 하여금 자기의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게 유도한다. 그런데 이런 죽음이 과연 웰다잉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웰다잉이 되려면 먼저 웰빙이 되어야 한다. 건강하게 잘 살지도 못했는데 잘 죽을 수 있겠는가?


서구의학의 폐암 진행암 치료 성적을 보면 1차 항암 실패 후 2차 항암을 시도한 환자들은 그 절반이 4개월~7.9개월 안에 사망한다고 한다. 나머지 절반도 얼마 안 가서 모두 사망한다. 이것이 현실이다. 대증요법 때문에 생긴 병을 대증요법으로 치료하려고 붙잡고 있으니 병이 나을 수 있겠는가? 현재 서구의학으로 진행암은 못고친다는 것이다. 말기암환자가 암병동에서 항암을 받고 있다면 예측된 죽음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과 같다. 세계적인 면역학자 아보 도오루도 진행암인 상태에서 항암치료를 계속 받는 것을 반대한다. 그는 그의 저서에서 병원 수련의로 근무하던 경험을 회고하며 이렇게 이야기한다. "한 명도 남김없이 모두 죽어나갔다. 이런 치료는 절대로 받아서는 안되는 것이었다."라고.

그러면 어떻게 하면 나을 수 있는가? 일단 전이된 다음에는 항암을 중단해야 한다. 항암이 무엇인가? 암에 대항하는 것이다. 그런데 암이 무엇인가? 생체의 방어반응이다. 그러니 항암은 자기 몸과 싸우는 것이다. 자기 몸과 싸워서 어떻게 이길 수 있겠는가? 만일 이긴다면 그것이 의미하는 바는 죽음일 것이다. 실제로도 그러하다. 암은 크기가 줄어들었는데 사람이 죽어나가는 일이 생긴다. 암은 나와 별개의 나쁜 것이 아니라 내 몸 그 자체가 변형된 것이다. 그것이 변형된 이유는 정상적인 방어반응을 차단하였기 때문이다. 몸의 반작용이 우회로를 선택하여 발현된 것이다.


또, 병이 나으려면 생체의 방어반응을 유발할 수 있는 것들을 회피해야 한다. 체질에 맞지 않는 음식, 체질에 맞지 않는 약물, 체질에 맞지 않는 운동, 체질에 맞지 않는 사람관계(스트레스)를 모두 피해야 한다. 어떻게 그걸 다 하느냐고 칭얼대면 나을 길이 없다. 여태까지 그렇게 칭얼댔기 때문에 병이 점점 커진 것이다. 체질섭생을 실천할 때 비로소 암이 자연퇴축될 수 있는 몸의 바탕이 마련된다. 암을 치료할 때 암만 볼 것이 아니라 암을 만드는 몸을 보아야 하며, 그 몸이 방어반응을 유발하지 않게 하여야 암이 스스로 물러갈 수 있다.


이미 항암을 받고 있고 받을 예정이라면 몸의 정기를 보하는 체질약을 사용해야 한다. 항암을 받으면 부작용으로 몸의 기력이 쇠하여 암도 줄어들지만 사람도 쇠약해져서 죽는다. 암 자체보다는 항암 부작용으로 죽는 사례도 많다. 정기를 보하는 체질약은 구성약재 자체에 독성이 없고 체질에도 맞기 때문에 부작용이 없다.

암치료에서는 의사 뿐 아니라 환자, 보호자 모두 지혜로워야 한다. 환자는 적극적으로 근본치료를 시도할 의지를 보여도, 보호자가 고지식한 마음으로 항암만 고집하면 환자를 결국 죽이게 된다. 당장 암이 퍼졌다고 하면 겁도 나고 돈도 많이 들고 두려운 마음에 위축된다. 내 가족한테 왜 이런 일이 생겼나 세상을 원망하는 마음과 분노, 불신이 그 사람의 마음에 가득 차서 병이 왜 생겼는지 이해해보려고 하기 보다는 생각없이 항암만 받게 하다가 예측된 죽음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전이암은 항암으로 나을 수 없음을 직시해야 한다. 항암은 대증요법의 연장선상에 있다. 대증요법으로 생긴 병이 대증요법으로 낫겠는가? 같은 방법만 쓰면 같은 결과만 얻을 뿐이다. 그리고 병은 남의 탓이 아니고 내 탓이다. 분노와 원망하는 마음을 버리고 문제해결에만 집중해야 한다. 나으려면 환자가 암을 빚어낸 삶의 방식을 바꿀 수 있도록 옆에서 묵묵히 도와주고 함께 노력하는 수밖에 없다.


암환자의 증상에 체질침이나 체질약을 쓰면 중병임에도 불구하고 치료효과가 잘 나온다. 예를 들어 항암 부작용으로 생긴 메쓰꺼움, 구토, 발열, 통증 등은 다른 대증요법이 방해만 하지 않으면 치료효과가 뚜렷하게 나온다. 이것은 어떤 측면에서 보면 매우 기이한 것이다. 가벼운 염좌도 진통소염제나 수면제를 복용해버리면 체질침 효과가 제대로 나오지 않는다. 그에 비하면 암은 난치병 중의 난치병이라고 하는데 대증요법이 개입하지 않는다면 그 증후군에 대하여 비교적 치료효과가 잘 나온다.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병의 경중보다 대증요법이 몸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의 여부가 치료를 더 크게 좌우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암은 대증요법의 영향력이 작용하고 있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다. 암은 대증요법으로 빚어진 결과이지만 다른 대증요법이 추가로 개입하지 않는 한 대증요법의 영향력이 계속 가해지는 상태가 아니다. 필자는 그 이유에 대하여 생각해보다가, "몸에서 암세포가 하는 분명한 역할이 있다"는 잠정적 결론에 도달했다. 암은 몸이 스스로 대증요법에 대항하여 생체방어반응의 우회로를 생성·유지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다. 그 때문에 근본요법의 효과가 여전히 전달될 수 있는 통로가 확보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그 우회로를 생성·유지하는 것은 공짜가 아니다. 육체적으로 엄청난 에너지가 소모된다. '혈관신생'이라는 현상이 있다. 암세포가 몸 여기저기에 혈관을 뻗어서 온몸의 혈액을 쓸어모아서 자기 혼자 쓰는 것이다. 방어반응의 우회로를 보존하는데 들어가는 막대한 경비인 셈이다. 이렇게 온 몸의 에너지를 빼앗기면 소위 '악액질'이라고 하여 환자는 피골이 상접하고 정기가 쇠약해진다. 암을 제거한답시고 항암제나 방사선을 쓰면, 암세포는 방어반응의 우회로를 확보하기 위하여 또 다른 통로를 모색하게 된다. 그 우회로는 그나마 건강하게 남아있는 세포를 바탕으로 조직될 수 밖에 없고, 결국 암은 더 깊숙히 들어가며 그 남아있는 건강한 세포마저 거덜내게 된다. 이것은 어리석은 자살행위나 다름없다. 암만 볼 게 아니라 암을 만드는 몸을 봐야 한다. 암은 몸에 필요해서 생긴 것이다. 암이 없으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상태의 몸이기 때문에 암이 생겨난 것이며, 그래서 몸을 좋게 하는데 주력해야지 암만 제거하려고 하면 최종적으로 사람을 죽이게 되는 것이다.

전이암의 상태에서 항암을 안하고 그저 좋아하는 밭농사를 지으며 사는 어느 할머니는 십년 이상 잘 살고 있고, 나을 거라는 기대감으로 적극적으로 항암을 했던 노인은 관에 들어가는 걸 보았다. 물론 항암만 피했다고 그 할머니가 오래 살았던 것은 아니며, 무의식적으로 그 분 체질에 해로운 것은 피하고 체질에 유익한 것을 섭취하는 등의 섭생을 어느 정도 실천한 것으로 확인되었다. 수세기 동안 의학은 많은 발전을 한 것처럼 보이지만 어쩌면 근본적인 측면에서는 제자리 걸음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몸(자연)의 의도를 읽고 그 의도에 맞추어 몸을 개선해가는 것을 기대하기에는 아직도 너무 이른 것일지도 모른다.


8체질의학의 창시자인 권도원 박사는 암환자를 치료하여 암마커를 소멸시켰고, 그 결과와 그가 제시한 이론체계가 미국의 노바 사이언스라는 과학출판사가 펴낸 국제학술논문집에 실렸다. 놀라운 결과이지만, 체질적인 불균형이 암의 원인이며 그 불균형을 바로잡는 것은 체질에 맞는 생활습관이라는 관점에 따르면 당연한 결과일 수 있다. 의학은 지금까지 몸을 기계로 보았고, 그 결과 병으로 나타난 증상은 귀찮은 것, 나쁜 것, 불필요한 것으로 보기만 하고 그 증상과 관련된 미생물 및 조직을 파괴하고 죽이는데 주력해왔다. 그것이 임시방편이요, 미봉책은 되었을지 몰라도 그 한계가 바로 암이라고 하는 정복 불가능한 질병으로 나왔을 때 사람들은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일찌기 장자莊子는 2300년 전에 無用之用, 즉 "쓸모없는 것의 쓸모있음"을 말했다. 암이라고 하는 것이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쓸모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자연이 만들어낸 것인 만큼 그 나름의 존재 의미가 있을 것이며, 그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생체의 방어반응이 대증요법으로 막혔을 때 몸이 그것을 우회하는 경로를 생성·유지·보존하는 것"이라고 생각된다. 따라서 암 자체를 죽여 없애려는 시도로 암을 근본치료할 수는 없으며, 오로지 생체의 방어반응이 나올 필요가 없도록 생활습관을 체질에 맞게 조정하는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전이암은 첨단장비로 무장한 집중치료실을 무력하게 만들고, 오히려 매일 밥상에 올라가는 체질에 맞는 소박한 음식들에 뒷걸음질쳤다. 의학은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서 이 모든 문제를 진지하게 탐색해봐야 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될 것이다.


필자의 클리닉에서 도울 수 있는 암환자는 환자 스스로 병원에 올 수 있을 정도의 체력을 가지고 있고, 동시에 식사 배변 배뇨가 가능한 사람이다. 만일 암세포가 식사 배변 배뇨의 통로를 완전히 막아버리면 치료가 어렵다. 이 때는 서구의학의 수술 같은 방법으로 그 길을 연 다음에 치료를 시도하는 게 나을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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