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칼럼

앙트안 베쌍의 관점

메르스 사태와 관련하여 나온 여러 의견과 조치는 아주 중요한 점을 놓치고 있다. 메르스 사태를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앙트안 베쌍Antoine Béchamp"이라는 이름을 기억해내야 한다. 베쌍은 흔히 파스퇴르의 라이벌로 알려져 있다. 베쌍은 "발효"의 개념을 처음 발견하였지만 파스퇴르가 그 업적을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여 논쟁이 붙었고, 이 논쟁은 미생물학, 병인, 매종설까지 확대되었다. 그리고 당시 지식인들이 파스퇴르의 손을 들어주면서 베쌍의 관점들은 잊혀지고 말았다.

베쌍은 발효미생물이 숙주와 환경요소에 따라 박테리아를 만들어낸다고 주장하였고, 결코 박테리아가 몸 밖에서 침입하여 병을 만들어낸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은 지금 서양의학이 취하는 관점과 매우 다르고 오히려 한의학이 취하는 관점과 유사하다. 필자는 병인에 대한 베쌍의 관점이 오히려 참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질병의 책임을 어떤 박테리아나 바이러스 하나에 지우고 그것 외에 다른 요소를 보지 못하는 것이 더 기이하게 여겨진다.

파스퇴르가 베쌍보다 우위에 서게 해 준 실험이 있다. 이 실험은 백조목 플라스크 안에 고기즙을 넣고 멸균하여 그 안에서 미생물이 생겨나는지 관찰한 실험이다.(위 그림 참조) 백조목처럼 구부러진 좁은 관 때문에 외부의 공기는 들어오지만 미생물은 들어오지 못하게 한 조건에서 플라스크 안에서는 미생물이 발생하지 않았고 이것으로 미생물 자연발생설이 무너지고 생물속생설, 즉 유기물은 유기물에서만 비롯한다는 주장이 우위를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실험은 중요한 결함이 있다. 무기물이 유기물로 변하기 위해 어떤 조건이 필요할 수도 있는데, 자연상태에서는 그 조건이 만족되는 반면 파스퇴르가 인위적으로 설계한 그 실험에서는 그 조건이 만족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파스퇴르의 실험이 무기물에서 유기물이 만들어질 수 없다는 확증은 되지 못한다는 이야기다.

게다가 이후 밀러Miller의 실험에서 어떤 조건에서는 무기물이 유기물로 변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밀러는 무기물에 증기와 고압의 전류를 가하고 응축시켜 유기물로 만드는데 성공하였다. (아래 그림 참조) 따라서 파스퇴르의 주장은 간단히 부정되고 만다.

혹자는 밀러의 실험이 주는 의미를 축소하기 위해 이렇게 반론할 수도 있다. 밀러의 실험은 어떤 조건에서 무기물이 유기물이 될 수 있다는 것은 증명하지만, 그 실험에서 충족한 조건이 자연계에서 충족되는지는 증명하지 못한다고. 왜냐하면 인위적인 실험으로 설계한 조건이 자연계에서 그대로 나타난다는 보장이 없으니까.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러한 반론은 바로 파스퇴르의 실험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된다. 따라서 그러한 반론을 사용한다면 파스퇴르의 실험, 아니 모든 종류의 실험은 더이상 결론을 끌어내는데 어떤 의미도 주지 못한다. 만일 자연과학의 연구방법으로서 "실험"을 부정한다면 남는 방법은 "관찰" 밖에 없다. 그리고 우리는 포도가 어떤 조건에서 포도주가 되기도 하고 썩어버리기도 하는 것을 "관찰"할 수 있는 것처럼, 우리 몸을 구성하는 미생물들도 어떤 조건에서는 균형과 질서(건강)를 유지하지만 어떤 조건에서는 불균형과 무질서(질병)가 나타남을 추론하고 관찰할 수 있다.



파스퇴르가 얻은 결론을 우리 몸에 적용하면, 만일 우리 몸에서 그 전에 없었던 미생물을 발견하면 그것은 외부에서 칩입한 것으로 간주되고 그 때 몸에 나타나는 새로운 증상을 그 미생물 탓으로 돌릴 수 있게 된다. 즉 파스퇴르는 그 실험에서 이렇게 연상한 것이 아닐까? 플라스크는 우리 몸이고, 안에 있던 멸균된 고기즙은 우리 몸의 원래 상태이며, 외부에서 미생물이 칩입하지 않는다면 플라스크에서 미생물이 발생하지 않는 것처럼 우리 몸에서도 질병이 발생하지 않는다 이런 식의 맥락이 얻어진 것 같다. 하지만 이것은 실제 자연상태와 너무 다른데, 플라스크와는 달리 우리 몸은 외부와 계속 교류하고 있고 멸균된 고기즙과 달리 우리 몸 안의 미생물은 계속 생성중이고 외부환경 조건에 따라 그 미생물 상태는 변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그 실험 결과를 우리 몸에 대입하면 잘못된 맥락이 얻어지는 것이다.

누가 뭘 먹고 배탈이 났을 때 같은 현상을 보고 우리는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1. 어떤 음식을 먹었다. 그 음식 안에 있는 미생물로 탈이 났다.
2. 어떤 음식을 먹었다. 그 음식이 그 사람 체질에 맞지 않아 몸의 거부반응으로 탈이 났다. 그리고 그 결과 몸에 이미 존재했던 미생물이 다른 상태로 변하였다.

누가 감기에 걸렸을 때 같은 현상을 보고 우리는 다르게 해석할 수 있다
1. 감기바이러스가 몸에 침입해서 오한 근육통 발열 가래 기침 인후통 등이 나타났다
2. 몸이 차갑고 건조한 공기에 노출되어 오한을 느꼈으며, 몸이 이에 대하여 차가운 공기가 접촉하는 면을 최소화하려고 근육을 긴장시키는 바람에 근육통이 생겼다. 그리고 차가워진 몸을 덥히려고 열을 내었고, 특히 차가운 공기에 직접 노출된 머리와 얼굴과 인후와 기관지에 열이 집중되어 머리가 아프고 목이 붓고, 인후부 근처의 체액이 이 열에 졸아들어 가래가 되었다. 가래가 목에 끼니까 몸은 기침을 하여 그것을 뱉아내려고 하였다. 면역반응의 결과 몸에서 바이러스가 생성되었다.[각주:1]

1은 미생물이 외부에서 침입하여 병이 났다고 하고, 파스퇴르의 관점이다.
2는 환경변화에 대하여 항상성을 유지하려는 숙주의 되먹임이 병의 원인이라고 하고, 평소 안 보였던 미생물이 나타난 것은 이미 몸에 있던 미생물이 이런 되먹임에 의하여 변한 것이라고 한다. 이것은 앙트안 베쌍의 관점, 그리고 한의학의 관점과 비슷하다.

살아있는 것이 죽은 것과 다른 점이 무엇일까? 그것은 "되먹임"이다. 파스퇴르의 관점에서는 그 되먹임을 고려하지 않는다. 파스퇴르의 실험이 상징하는 체계는 그 음식을 먹은 사람의 몸이 그 음식에 대해 반응하는 것을 고려하지 않는다. 나타나는 증상은 미생물이 일방적으로 몸에 미치는 영향으로만 간주한다. 하지만 베쌍은 생명의 되먹임을 고려한다. 그래서 필자는 베쌍의 관점을 더 타당하다고 본다. 베쌍의 걸작 <The Blood and Its Third Element>는 우리말로는 아직 번역조차 되지 않았다. 학계의 편향된 성향을 엿볼 수 있다.

파스퇴르의 관점 때문에 이후 서양의학은 미생물을 죽이는 항생제와 항바이러스제 개발에 집중하게 된다. 이것은 병인을 잘못 짚은 것이었고 근본적인 해결이 아니었기에 다시 다제내성균과 슈퍼박테리아 같은 문제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고 인류는 아직도 잘못된 방향으로 계속 전진중이다.

이런 주장은 무척 충격적으로 들린다. 사람들은 이렇게 이야기할 것이다. 그러면 여태까지 의학이 전개되어온 방식은 무엇이었나? 그 모두가 사기였다는 말인가? 아니, 수십억 명이 속았다는 것인가? 설마 그럴리가...이게 자연스러운 반응일 것이다. 하지만 이것이 사실이다. 의도된 것이 아니었다고 하더라도 파스퇴르의 잘못된 결론은 지금까지 의료의 거대한 방향을 결정지었고, 그 어마어마한 결과물들은 그 잘못된 관점을 다시 합리화하는 방향으로 작동하였다. 그 힘은 학계를 주무르고, 비대해진 의료제약산업이 그것을 합리화하고, 심지어는 의료를 다룬 티비드라마와 영화('아웃브레이크'나 '감기' 같은 작품들)로 그런 맥락이 대중들 속으로 재생산되어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로 하여금 이런 관점에 익숙해지고 무비판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파스퇴르의 관점이 틀렸고 베쌍이 옳다면, 많은 것들이 완전히 다르게 해석된다. 당장 메르스 사태를 살펴보자. 그것은 상당부분이 신기루와 같다.

첫째, 베쌍의 관점에 따르면 바이러스는 전염된 것이 아니다. 메르스 바이러스가 생겼다면 그 당시 숙주와 환경요소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바이러스를 가진 사람과 접촉한 부부 중에 한 사람은 바이러스가 생기고 다른 사람은 생기지 않았다. 생기지 않은 사람은 왜 생기지 않았는가?에 집중해보면 이 사태의 진실이 보일 것이다.

둘째, 바이러스가 원인이 아니므로 항바이러스제를 투여할 필요가 없다. 백신도 개발할 필요가 없다. 증상이 나타난 환자는 자기 몸에 맞게 음식 생활습관 등을 조절하여 몸의 항상성을 회복하면 된다.

셋째, 사망자들은 바이러스 때문에 죽은 것이 아니라 이미 앓고 있던 병과 잘못된 치료 때문에 죽었다. 사망자중 90퍼센트는 노령이거나 지병이 있었다.http://media.daum.net/issue/636/newsview?issueId=636&newsid=20150618090213450 [각주:2]이렇게 생각하여 보자. 메르스 사태가 터지지 않았다면 이 분들이 지금 살아있을까? 그 분들에 대하여 진실로 애도하는 바이나 그 가능성에는 회의적이다. 뉴스보도에 의하면 그 분들이 앓던 병은 결코 가벼운 상태가 아니었다. 여기에 동의한다면 이 문제가 다르게 보일 것이다. 메르스는 언론의 호들갑에 비하면 실제로는 거의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언론이 염려하는 "통설이 깨진 케이스"의 환자는 잘못된 치료로 죽었을 가능성이 많다. 감옥이나 다를 바 없는 병동에 갇혀서 움직임도 제약되고 차가운 에어컨 바람만 맞다보면 열이 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그 때 병원에서는 바이러스도 있겠다, 열도 났겠다, 드디어 메르스증상이 발현되었나 보다 하고 이것저것 독한 약들을 마구 투여하지 않았겠냐는 것이다. 그러면 그 과잉치료로 상태가 훨씬 더 악화되어 사망할 수 있는 것이다.[각주:3] 그러면 그 다음 수순은 언론에서 "메르스 환자 또 사망" 이렇게 내보내고 이 기사를 읽는 시민들은 하얗게 질려 마스크와 항균제품들을 구입하면서 공포를 달래지 않겠냐는 것이다. 이 전체 그림은 우리가 상황을 오해하고 있음을 암시한다. 메르스가 사람들한테 심각하게 여겨진 것은, 실제로 메르스가 미친 효과 때문이 아니라 언론에 의해 빚어진 메르스에 대한 재귀적 공포가 빚어낸 효과가 아닐까?

넷째, 무증상자들은 격리를 해제하여야 한다. 발병 여부는 바이러스에 달려 있는 게 아니라 숙주의 상태, 그리고 그 상태를 결정짓는 섭생, 면역력에 달려 있다. 음식, 목욕, 운동, 활동, 사소한 여러 가지 유익한 습관들, 그것들을 일일이 중앙에서 컨트롤해줄 수는 없다. 생활습관은 개인의 몫이며 이것은 분산화된 해법이다. 필자는 막대한 재화와 인력이 이동할 수 밖에 없는 현대산업사회에서, 그리고 인구의 절반이상이 대도시에 밀집거주하는 세상에서 사람 대 사람의 접촉을 막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http://economy.hankooki.com/lpage/society/201506/e2015061618352893760.htm 그건 정부도 못하는 것이다. 만일 메르스가 한풀 꺾인다면 바이러스가 전멸했다기보다는 사람들이 다시 자기의 평온한 일상으로 돌아갔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메르스 사태는 일종의 집단 히스테리다. 메르스 관련 뉴스 댓글을 자세히 관찰해보시기 바란다. 거기에 합리적인 이성이 존재하는가? 왜 메르스를 못 잡냐고 아우성치는 군중들, 메르스를 잡겠다고 큰소리치는 정부, 우리는 메르스와 싸우는 전사들이라며 각오를 불태우는 의료진들, 모두 제 정신이 아니다. 모두 어떤 의미에서 미쳐 있다. 병인病因에 대한 잘못된 관점에 붙잡혀서 "보이지 않는 유령"과 싸우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파스퇴르의 관점이 채택된 것은 그것이 사실이기보다는 "편리한" 생각이었기 때문에, 그리고 그 관점이 자본의 이익에 부합하였기 때문일 것이다. 병인을 미생물로 지목하기는 쉽다. “미생물과 숙주·환경의 상호작용”은 역동적인 양상을 보여주기 때문에 개념적으로 잘 잡히지 않지만, 미생물은 각각 하나의 실체로 끊어서 볼 수 있어서 병인으로 지목하기가 편하다. 당시 대중들은 베쌍보다 파스퇴르가 더 쉽게 느껴졌을 것이다. 게다가 병의 책임을 오로지 어떤 미생물 탓으로 몰아가고 그걸 죽이는 쪽으로 치료방향을 설정하면 자본의 이익을 극대화할 수 있다. 미생물을 죽이는 약물을 개발하여 팔 수 있고, 그것은 근본적인 병인을 바로잡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증상은 재발하거나 여러 가지 형태로 변형되어 그에 대한 또 다른 약물 수요를 창출해내기 때문에 자본의 입장에서는 매우 유익하다.

하지만 베쌍의 관점을 채택한다고 가정해보자. 숙주의 상태와 환경요소를 병인으로 보면, 치료를 위해서 환자 개인의 체질과 생활습관 등에 주목해야 한다. 그리고 나아가 사회환경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것은 자본한테는 불편하다. 예를 들어보자. 여기에 두 명의 의사가 있다. 한 명은 가벼운 증상을 가지고 온 환자한테 그 환자의 체질에 주목하고 그에 따라 음식 생활습관 등을 바로잡는 방향으로 치료한다고 치자. 그렇게 하여 그 환자가 나았고 더 악화되지 않았으며 재발하지 않았다. 그 사람은 의사의 조언에 따라 좋은 생활습관을 유지함으로써 병원을 방문하는 회수가 최소화되었다. 한편, 다른 의사는 환자의 병을 특정 미생물의 탓으로 돌리고 그 미생물을 죽이는 약을 지속적으로 투여한 결과 작은 병이 근본적으로 치유되지 않아서 점점 큰 병이 되었다. 그 환자 몸에서는 다제내성균과 슈퍼박테리아가 만들어지고 더 손쓸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매일 엄청난 입원비를 지불하게 되었다. 의사의 입장에서는, 또 그 의사에게 대출을 해주고 이자를 받는 자본의 입장에서는 어느 쪽이 이익인가? 게다가 환경요소(에 대한 개체의 되먹임)를 병인으로 보면 의학은 의학의 경계를 넘게 된다. 그것은 사회학, 정치학, 생태학, 경제학이 다루는 주제와 연결된다. 사회환경이 숙주(환자)에게 미치는 유해한 영향을 바로잡아야만 의료의 목표가 달성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본한테는 베쌍의 관점이 채택되면 곤란한 것이다. 베쌍의 관점이 의미하는 것은 전면적인 사회개혁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기존 경제질서에서 자본의 이익을 위해서는 진정한 병의 원인은 감추어져야 하고 감추어질 것이다. 이것이 우리 사회의 진정한 비극이다. 학계와 언론에서 병의 원인으로 몸안에서 이루어지는 어떤 종류의 생화학반응을 지목하고 그 생화학반응이 왜 생겨났는지에 대해서는 더이상 파고들지 않을 때, 단기적인 대증요법으로 환자를 낚아 만성질환자를 만들어갈 때, 많은 의료인들은 자신은 그저 열심히 일하고 있을 뿐이라고 합리화할 수 있다. "우리가 그렇게 의학을 만든 게 아니잖아. 우리는 학교에서 배운 대로 하고 있을 뿐이야. 교수들 탓 아닌가?" 이에 교수들은 아카데미의 참호 뒤로 몸을 숨기면서 파스퇴르의 관점에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에게 "당신이 무엇을 아느냐? 우리만큼 배웠냐?"며 얼굴을 붉힐 것이다. 만일 대중들이 이런 반응에 굴하지 않고 소통과 올바른 이해를 시도한다면 그 때 비로소 새로운 의학, 새로운 의료가 만들어질 것이다.

<벌거벗은 임금님>이라는 동화가 있다. 임금이 신하들을 다그쳐서 최고의 옷을 만든다는 재단사를 불러온다. 그 재단사는 어리석은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 옷이라며 임금과 신하들에게 사기를 친다. 허영심에 찌든 임금과 신하들은 서로 눈치를 보며 차마 옷이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진실을 이야기할 수 없다. 보이지 않는다고 하면 자기가 바보가 되는 것이기에...그리하여 어리석은 퍼레이드가 시작된다. 임금은 벌거벗은 채로 큰길을 위풍당당하게 행진한다. 이것을 보고 한 어린이가 웃음을 터뜨리며 "임금님은 벌거벗었다"고 소리친다. 임금은 드디어 옷이 안보이는 게 아니라 없다는 것을 깨닫지만 체통을 지키기 위해 근엄한 표정으로 계속 행진한다.

앙트안 베쌍의 관점으로 메르스 사태를 들여다보면 우리는 지금 거대한 쇼가 벌어지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벌거벗은 의학의 진실 앞에서 교수들과 이해관계자들은 아마도 그 임금처럼 침묵할 것이고 계속해서 행진할 것이다. 그들은 파스퇴르의 아름다운 관점은 어리석은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고 둘러대며 헛기침을 할 것이다. 그래, 우리는 보이지 않는다. 지금 우리에게 보이는 것은 벌거벗은 의학의 진실이다.

  1. 바이러스가 실제로 한 사람의 몸에서 다른 사람의 몸으로 옮겨가는 장면을 찍은 동영상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디어를 통해 우리가 보는 장면들은 컴퓨터그래픽에 불과하다. 즉 바이러스병인설은 엄밀히 말해 병의 원인에 대한 하나의 가설일 뿐이다. [본문으로]
  2. 필자는 예전에 요양병원에서 근무한 적이 있다. 그곳에서 지병이 있는 노인환자분들은 감기만 걸려도 쉽게 폐렴으로 진행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이런 사례들을 관찰하다보면 환자의 면역력이 가장 중요한 변수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리고 면역력은 제질에 맞는 섭생에 달려 있다. [본문으로]
  3. 인터페론은 그 부작용만으로도 치명적일 수 있다. [본문으로]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보리와 다이어트  (0) 2015.07.08
위궤양  (0) 2015.07.03
팔미지황탕  (0) 2015.06.18
생맥산  (0) 2015.06.15
축농증  (0) 2015.06.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