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에 피부병 치료해드린 환자분이 아드님을 데리고 왔다. 아드님을 진찰베드에 눕히더니 윗옷을 벗겨서 보여준다.건선이다. 복부 여기저기에 퍼져있다. 건선이 있는 피부표면이 바싹 말라있고 발적된 경향도 있어서 주변 피부와 뚜렷한 차이를 보여준다. "5개월 전부터 이렇다"고 한다. 병원에서 준 스테로이드로 추정되는 연고를 사용했으나 잠깐 낫는 것 같다가 마찬가지여서 왔다는 것. 머리카락 속을 보여주는데 비듬이 많고 두피도 발적되어 있다. 앞머리카락을 손가락으로 넘겨보니 이마는 더 심하다. 손 만져보니 땀이 많다. 근육량이 충분해서 나이에 비해 탄탄해보인다. 증상은 초코렛 먹을 때 뚜렷하게 악화된다. 해물을 안좋아하고 낙지 먹고 토한 적이 있다.
환자체질이 그 아버지와 같은 목양체질이라서 치료부담이 덜했다. (아버지와 같은 패턴이라고 짐작했고 나중에 이 짐작이 맞다는 걸 확인한다.) 증상이 심해서 침과 한약을 병행하고 체질식을 알려주었다. 2회치료를 마치고 3일 후 필자가 점심먹고 한의원으로 돌아오는데 이 아이가 인라인스케이트를 타고 달려온다. 물어보니 집에서 계속 타고 왔다는 것. 아이피부는 땀으로 흠뻑 젖어있다. '치료 잘 되겠구나' 느낌이 든다. 1 하지만 막상 복부를 보니 악화됐다. 발적이 더 뚜렷해졌고 얼굴까지 퍼졌다. 사용한 연고가 스테로이드라도 사용안한지 꽤 시간이 흘렀으므로, 이 악화를 스테로이드 끊었을 때 나타나는 리바운드로 보기는 무리가 있어보인다. 그렇다고 명현暝眩 2으로 보기도 어렵다. 명현이면 적어도 전체컨디션이 전과 비교했을 때 뚜렷하게 향상되어야 하는데 특별히 그런 것 같진 않다. 치료방향을 수정해야 했다. 3
첫번째 투여한 처방은 기氣를 보補하는 처방인데 이것을 먹고 악화됐기 때문에 환자의 증을 혈열血熱로 추론했다. 기氣를 보補하는 처방은 강심시키고 심장흥분도를 높여준다. 심장흥분도가 높아지면 혈열이 심해져 피부병의 충혈 염증 가려움이 악화된다. 온돌방 바닥이 이미 너무 뜨거운데 구들장에 불을 더 때면 방바닥이 그을리는 것과 같은 이치다. 이 때가 3회치료. 5회치료까지 경과를 더 지켜보다가 처방 잔여분을 회수하고 혈열을 식히는 처방으로 교체 투여했다.
그로부터 10일이 지나 그 어머니가 "많이 좋아졌다"고 한다. 배를 살펴보니 건선 색깔이 옅어졌다. 8회치료에서 아이 아버지랑 얘기하다가 "그동안 얘랑 같은 방에서 잤다"는 얘기를 들었다. 그제서야 병인을 좀 더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다. 같은 체질끼리 한 방에서 자고 그래서 서로의 머리카락 인설 등을 흡입하면 그것이 원인이 되어 알러지질환을 유발한다. 이 아이와 아버지도 그것이 병의 원인이였던 것. "큰아이와 같은 방에서 자지 말라"고 권고했다. 2주 더 치료했는데, 마지막 치료는 아이 혼자 왔다. 이 때는 한눈에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피부가 깨끗해졌다. (치료기간은 2달반이었다.)
보호자는 처음에 아이 피부병이 씻는 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최근 이사한 곳 상수도관이 오래되어 물이 깨끗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것은 가장 큰 원인이라고 할 수 없는데, 같은 물로 샤워를 한 다른 가족의 피부는 깨끗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섭취하는 음식, 같은 체질을 가진 사람과의 접촉을 더 큰 원인으로 봐야 한다.
- 목양체질은 일반적으로 땀을 내는 것이 피부병 치료에 도움이 된다. [본문으로]
- 병이 치유되기 직전 일시적으로 악화되는 것처럼 보이는 현상 [본문으로]
- 처음부터 치료방향을 올바르게 설정한다면 더할 나위없이 좋겠지만 환자 병리가 복잡하고 증상에 대한 정보가 부족할 때는 가벼운 치료를 해보고 그 반응을 관찰해서 치유의 단서를 추출할 수도 있다. 이런 경우 오히려 부작용이 뚜렷하게 나타나주는 것이 현재증상의 성격을 명확하게 보여주기 때문에 치료방향이 빨리 설정될 수도 있다. 단, 이 때는 아주 심플한 처방을 투여하거나 시술해봄으로써 그 치료로 생길 수 있는 리스크를 적절한 범위로 한정해야 한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