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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虛則補其母, 實則瀉其子

한의학의 치료원칙 중에 虛則補其母, 實則瀉其子라는 게 있다. "허하면 그 어미를 보하고 실하면 그 자식을 사한다"는 뜻인데 사실, 이 짧은 구절 안에 문제해결 방법론에 대한 심오한 철학이 숨어있다.

虛則補其母, 實則瀉其子는 사실 압축된 문장이다. 생략된 부분까지 살리면 正氣虛則補其母, 邪氣實則瀉其子라고 해야 한다. 따라서 "정기가 허하면 그 어미를 보하고 사기가 실하면 그 자식을 사한다."가 된다. 

정기正氣는 건강한 생명활동을 위해 우리몸에 있어야 하는 것, 사기邪氣는 우리몸에 없어야 하는 것을 모두 아우른다. 허虛는 부족 결핍, 실實은 과다 과잉을 뜻한다. 따라서 정기허는 우리몸에 있어야 하는 것이 부족한 상태, 사기실은 우리몸에 없어야 하는 것이 넘치는 상태다.

정기허 사기실은 현재 상태에 대한 묘사다. 예를 들어 내부장기가 허약징후를 보이면 이것은 정기허다. 신장이 약해서 잘 붓거나 간이 약해서 늘 피로하거나 대장이 약해서 대변이 시원하게 통하지 않거나 위가 약해서 소화가 안되면 이것은 모두 정기正氣가 허한 것이다. 반면에 기관지에 가래가 차서 막히거나 어혈이 말초혈관에서 울혈되거나 감염원 때문에 염증이 확산되어간다면 이것은 사기邪氣가 실한 것이다.   

母는 현재상태를 잉태한 선행조건을 뜻하고 子는 현재상태가 잉태한 후행조건[각주:1]을 뜻한다. 정기가 허하다는 것은 개체의 현재상태가 그것을 만들어낸 선행조건에 지배되고 있음을 뜻한다. 즉, 선행조건이 현재상태를 압도적으로 결정짓는 구조이므로 그것을 개체에게 유리하게 전환해야 한다. 그것이 바로 補其母, 그 어미를 보[각주:2]하는 것이다. 반면에, 현재상태가 잉태한 후행조건이 계속 상태를 악화시키는 경우가 있다. 이런 경우에는 당연히 그 후행조건을 바꿔주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환자가 육식이 맞지 않는 체질인데 습관적으로 육식을 하여 만성적인 대장염에 걸렸다. 늘 변이 시원하지 않고 배가 자주 아프다. 이 때 병을 치유하려면 당연히 자기 체질을 알고 체질에 맞게 그 음식을 바꿔야 할 것이다. 음식이 현재상태를 빚어낸 선행조건 어미母가 된다. 또, 어떤 미용사 손이 피부염으로 엉망인데 그것이 매일 일하면서 사용하는 미용제품 때문이라면 그 미용제품 사용을 멈춰야 할 것이다. 자기 체질을 알고 그 체질에 알러지를 일으키지 않는 제품으로 바꿔야 할 것이다. 여기서는 그 미용제품사용이 문제를 잉태하는 어미母 선행조건이 된다.  반면에 어떤 환자가 급성충수염으로 천공되어 복막염까지 갔다고 하자. 물론 충수염이 온 것은 음식 스트레스 등의 선행조건이 있겠지만 무엇보다 복막까지 염증이 번져가고 있는 후행조건이 현재상태를 더욱 악화시킬 것이다. 따라서 후행조건인 감염원을 모두 제거하고 염증이 확산되지 않게 해야 한다. 또, 어떤 할머니가 만성적인 폐렴으로 기관지에 가래가 가득 차면 후행조건인 그 가래로 호흡이 곤란해질 수 있기 때문에 그 가래를 빼줘야 한다. 이것이 瀉其子,그 子를 사하는 것이다.

그래서 虛則補其母, 實則瀉其子는 현재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개입해야 하는가?에 대한 명쾌한 원칙이 된다. 이 원칙은 사실 의료 뿐 아니라 우리 일상에도 적용할 수 있다. 예를 들어 부부싸움을 생각해보자. 부부싸움이 일어난 선행조건은 남편이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오기 때문일 수 있다.[각주:3] 부부싸움을 하지 않으려면 술을 적게 마시고 일찍 들어오면 될 것이다. 하지만 부부싸움을 할 때 험한 말이 오고가면서 양자가 감정이 상해버렸다면 그 선행조건을 계속 바꾸라고 하는 것이 당장은 도움이 되지 않는다. 험한 말이 오고가는 후행조건이 현재상태를 악화시키고 있으므로 더이상 감정을 상하지 않게 말과 태도를 조심해야 한다. 험한 말과 거친 태도를 둘 사이 상호작용에서 배제해야 한다. 그리고 감정이 어느 정도 가라앉아 안정될 때 다시 그 선행조건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

이 원칙은 개인의 문제 뿐 아니라 사회문제 해결에도 도움이 된다. 어떤 도시에 범죄가 급증하고 있다면, 범죄를 발생시키는 선행조건들, 예를 들어 빈곤, 실업, 폐쇄적 도시구조, 취약한 법률, 모순된 제도 등을  바꿔줘야 한다. 반면에 깨진창문이론처럼 범죄가 만들어낸 후행조건이 현재 상태를 악화시키고 있다면, 강력한 처벌 단속을 통해 억제해야 한다. 일반적으로 선행조건 후행조건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고려되는 것이 좋다. 원인이 결과가 되고 결과가 다시 원인이 되는 이 세계의 순환구조 안에서 虛則補其母, 實則瀉其子는 판단과 행동에 관한 아주 명확한 기준을 제시한다.

주)

  1. 아주 오래된 텍스트를 연구할 때는 현대 추상어들이 가진 개념들이 과거에는 어떤 단어로 표현되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현대의 추상적인 개념들이 과거에 다뤄진 적이 없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현대인들의 착각일 뿐이다. 해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 같은 개념들이 다른 언어형식을 빌려 끝없이 변주되고 있을 뿐이다. (필자가 여기서 현재상태 뒤에 오는 것에도 조건이라고 한 것은 이것이 다시 현재상태에 영향을 주는 조건으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본문으로]
  2. 보補는 개체에게 유리한 선행조건을 만들어주는 것, 사瀉는 개체에게 불리한 후행조건을 배제하는 것을 뜻한다. [본문으로]
  3. 물론, 남편이 술을 마시고 늦게 들어오는 것은 그의 직업 사람관계 속에서 어찌할 수 없는 강제가 작동하고 있을 수도 있다. 선행조건 뒤에 또다른 선행조건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래디컬하게 파고드는 것은 분명히 필요하지만 여기서는 단순히 이 원칙이 어떤 식으로 적용될 수 있는가를 알려주기 위한 것이므로 편의상 더 깊이 들어가지 않는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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