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전 필자는 한통의 전화를 받았다. 암환자 보호자분인데 "아내가 난소암 말기이고 암이 간으로 전이되었다. 현재는 장폐색으로 변을 못봐서 고통스러워한다. 치료해줄 수 있는가?"라는 얘기였다. "환자를 진찰해봐야 한다"고 답하니 "환자가 거동이 불편하여 갈 수 없으니 왕진해 달라"고 한다. 간절히 부탁하시는터라 "진료 외 시간에 가보겠다"고 말씀드렸다. 암병동에서 환자를 직접 보니 얼굴이 창백하고 부어있다. 복수가 차있고 정신이 몽롱해보인다. 진통제 포도당주사를 정맥주사로 맞고 있다. 명치 아래 피부조직이 딱딱하게 굳었는데 "수술 후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그 아래 하복부는 완전히 굳지 않고 부드러운 편이다. 체질 진찰하고 서면동의서를 받은 후 다음날 약을 드렸다. 방귀까지는 나왔는데 변이 도무지 풀리지 않는다. 보호자한테 얘기했다. "지금 맞고 있는 모르핀이 장운동을 억제하고 있으니 그걸 끊지 않는 한 장폐색이 풀리긴 어렵다. 한쪽에서는 문을 열겠다고 하고 한쪽에서는 자물쇠를 걸어 잠그는 격이다." 보호자분이 "사실, 전에 다니던 산부인과의사도 그런 말을 했다. 모르핀 계속 쓰면 장운동 안되서 막힌다고 하더라. 그런데 진통제 끊으면 환자가 너무 고통스러워한다"고 곤란해한다. "그 산부인과의사분이 정확하게 얘기해주신 거다. 진통제로 땜질식 치료만 하니까 암이 커진 것이다. 통증이 있다는 것은 살아갈 힘이 그나마 남아있다는 얘기다. 그 힘을 진통제로 억누르기만 하면 병이 나을 수가 없다. 환자 스스로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결심이 서면 연락주시라"고 했다.
아마도 이 보호자분은 마지막 실 한오라기 잡는 심정으로 필자한테 전화했을 것이다. 급한 마음에 이것저것 다 해보려고 하지만 먼저 병이 왜 생겼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통증은 면역반응이다. 통증은 체질적으로 해로운 것을 계속 할 때 생기는 방어반응의 시그널이다. 따라서 체질에 해로운 것을 피하려고 해야지 겉으로 드러난 통증만 누른다고 병이 낫는 건 아니다. 자기 체질에 해로운 것을 피하지 않고 겉으로 나온 증상만 누르면 생체의 불균형은 점점 증폭되어가고 면역반응의 되먹임은 점점 격렬해져서 결국 몸을 다 쓸어버리게 된다. 그게 암의 본질이다.
섭생의 실수로 얻게 되는 고통을 진통제같은 대증요법으로 누르고 신경을 꺼버리기 때문에 계속 부주의한 생활습관을 유지하는 것이니, 모든 종류의 대증요법은 병을 키우는 주범이라고 해도 변명할 수 없을 것이다.
병이 나으려면 통증을 가리면 안된다. 1 통증은 내가 뭔가 잘못 하고 있다는 경보의 사이렌이다. 삶에서 뭔가를 바꿔야 한다는 알림이다. 그 경보를 울리지 못하게 하고 어떻게 병이 낫기를 바라는가? 작은 경보에 귀기울이지 않다가 마침내 그 경보가 커지면 진통제로 그 경보의 볼륨을 줄이고 그 경보가 암이 되어 온몸으로 비명을 질러대도 항암제 방사선요법 수술로 그 경보가 만들어지는 시스템을 망가뜨리고 도려낸다. 이런 상황에서 병이 낫길 기대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티비의학프로그램은 기존항암치료가 암을 성공적으로 다루는 것 같은 이미지만 보여준다. 그러나 그것은 이미지일 뿐이다. 치유되지 않은 사람들, 악화되고 사망하는 사람들의 리얼한 이야기를 여과없이 보여주고 들려줘야 한다. 미디어는 암환자들한테 장미빛 희망만 보여주지 말고 오히려 어두운 현실을 직시하게 해야 한다.
종양이 작아지고 통증이 사라진다고 반드시 병이 낫는 것은 아니라는 걸 환자들은 모른다. 종양을 만들어내고 통증을 유도하는 근본원인이 자기 평범한 삶 속에 있다는 걸 환자들은 모른다. 그 근본원인이 소위 '전문가'들의 교묘한 언어놀음 속에서 가리워지고 그래서 스스로 자기 삶의 모습을 자세히 살피는 일은 덜 중요하게 느껴지며 미디어로 보여지는 의료에 관련한 여러가지 신화에 빠져 대증요법에 막대한 진료비를 부담하면서 '예측가능한 죽음'으로 행진하고 있다는 걸 환자들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
호스피스운동hospice이라는 게 있다. 말기암환자 치료목표를 '낫는 것'에서 소위 '삶의 질'을 유지하는 쪽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하지만 호스피스운동은 대증요법으로 암에 대응하는데 실패했다는 뚜렷한 증거이며 엉터리서비스에 열받은 고객(환자)을 달래고 죽음을 순순히 받아들이게 하는 것이 그 목표다. 암환자한테 거론할 삶의 질 같은 것은 없다. 왜냐하면 암 말기로 갈 때까지 그 환자는 대증요법에만 매달려서 어떤 종류의 삶(통증)도 계속 거부해 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2 통증이 있을 때는 통증이 삶 그 자체다. 그걸 거부하고 암까지 달려왔는데 도대체 어떤 '삶'이 남아있다는 말인가? 작은 고통도 견디기 싫어서 이런저런 진통제를 달고 살다가 암에 걸린 것인데 거기에 '삶'이 어디 있다는 것인가? 3 거기 있는 것은 '있는 그대로의 삶'이 아니라 '희석된 삶'이다. 진통제,면역억제제를 통해 100분의 1, 1000분의1로 희석된 '희미한 삶의 그림자'가 존재할 뿐이다.
자연은 엄중하다. 내 체질에 맞지 않게 섭생하였을 때 그 되먹임으로 내가 느껴야 할 고통은 모두 정확하게 계산되어 나에게 돌아온다. 당장은 진통제 따위로 피할 수 있더라도 그만큼의 통증이 나중에 모두 더해져 다시 돌아온다. 말기 암환자가 진통제 끊었을 때 느끼는 통증은 그동안 밀린 매를 한번에 몰아서 맞는 것과 같다. 그렇게 격렬한 면역반응이 몰려올 때 그 사람이 과연 살아남을 수 있을까? 그 누구도 장담할 수가 없다. 근본치료를 지지하는 의료인이 할 수 있는 것은 단지 또 다른 면역반응이 더해질만한 요소(체질에 맞지 않는 섭생과 환경)를 배제하는 것이 전부이며 나머지는 모두 하늘에 달린 것이다. 고통을 감내하여야 한다. 그것이 그 환자가 생명의 법칙에 빚진 몫이다.
- 이 명제가 통증을 방치하라는 뜻으로 오해되어서는 안된다. 통증이 일어난 근본원인을 치료해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으로]
- 고타마 싯다르타는 삶을 고통이라고 하였다. 이것을 의학적인 언어로 옮겨보면 "삶은 면역반응"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삶의 본질은 개체와 그 개체를 둘러싼 환경의 상호작용이다. 그 상호작용이 면역반응이다. 고통을 느끼면 일단은 받아들여야 한다. 나중에 그 고통을 유발하는 상호작용에 대해 개입한다고 해도 그렇다. 그 고통을 인위적으로 억제하거나 가리면 안된다. [본문으로]
- 작은 면역반응을 대증요법으로 가릴 때 그 반동으로 더 큰 면역반응이 나타난다. 고통이 작을 때는 어느 정도 그 고통을 감수할 수 있고 감수하여야 한다. 그리고 동시에 그 고통의 뿌리인 삶을 돌아보고 바꿔야 한다. 한의학에서는 治未病을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이것은 아직 큰 병이 안되었을 때 치료한다는 것, 현대적으로 풀이하면 면역반응이 작을 때 치료하는 것이다. 가장 훌륭한 의사란 애초에 사람들이 병이 들지 않게 하는 의사이고, 그 다음으로 훌륭한 의사는 작은 병일 때 제대로 치료하는 의사이며, 가장 형편없는 의사가 병이 깊어졌을 때 치료해주는 의사다. 최악의 의사는 대증요법으로 겉으로 드러난 통증을 누르기만 하여 다 나은 것처럼 속여서 부지불식간에 병을 더 키우는 의사일 것이다. [본문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