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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명사와 형용사

현대에 이르러 말글문화가 많이 바뀌었다. 명사가 늘고 형용사가 줄었다. 에리히프롬같은 사회학자는 이것을 아주 중요한 변화로 본다. 형용사로 할 수 있는 이야기도 명사로 한다. 원래 영어권 국가에서 이런 변화들이 감지되었는데 아시아에서도 영어 사용자가 늘어나고 영어텍스트를 번역하여 오는 과정 중에 영어문체를 그대로 가져오면서 이런 변화가 포착되고 있다. 

'질병'이라는 말은 '아픈 현상'을 계속 변하는 과정 중 하나의 장면이나 국면으로 보는게 아니라 하나의 고정된 실체로 취급한다. 이렇게 되면 그 실체를 없애고 죽이고 잘라내는 것이 목적이 되어버리고 결국 대증요법, 다시 말해 눈앞에 보이는 증상만 없애면 모든 것이 풀린다..라고 생각하게 된다. 

사실 우리가 질병이라고 부르는 것은 몸이 계속 변하는 가운데 한 국면으로 그건 본인이 섭생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바뀔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질병'이란 말보다는 '아프다'가 더 나은 표현이다. '난 고혈압이야'와 '난 혈압이 높아'는 분명히 다르다. '고혈압'은 마치 굳어져서 변할 수 없는 것처럼 인식된다. 언어를 쓰는 것은 사람이지만 그 언어가 사람의 사고구조에 영향을 끼쳐 이 세계의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역동적으로 변화시킨다. 처음에는 편하려고 쓰는 표현이지만 점점 확고한 힘을 갖게 되어 그 언어 사용자의 관점을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한다.

'고혈압'이란 표현을 쓰게 되면 자기 상태를 하나의 굳어진 상태로 보기 쉽지만 '혈압이 높아'는 지금은 높지만 언제든 떨어질 수 있는 것으로 본다. 새로운 가능성에 열려 있는 것이다.[각주:1] 고혈압은 하나의 실체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그 실체에 또 다른 실체인 혈압약으로 대응하게 된다. '명사-명사'의 형태로 그 사람의 정신구조 속에서 인식의 흐름이 기계적으로 형성된다. 반면에 '혈압이 높아'는 "혈압이 왜 높아?"라고 묻게 되고 혈압이 높은 근본원인을 추적하고 묘사하게 만든다. '형용사-형용사'의 형태로 인식구조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요즘 주목받는 스토리텔링도 상황을 '명사'를 써서 기계적으로 인식하기 보다는 '형용사'로 그려내는 것이다. '명사'는 문제 그 자체만 초점을 맞추게 유도하지만 형용사는 문제를 둘러싼 환경, 문제를 낳은 환경에 초점을 맞춘다. 따라서 '형용사'가 만들어내는 스토리텔링이 '명사'보다 사태의 본질을 질적으로 더 정확히 이해하는 방법이 된다.       

언어생활에서 명사를 줄이고 형용사를 늘려야 한다. 그러면 모든 것이 변할 수 있다는 진실에 눈뜨게 될 것이다.

  1. 물론 장기 자체가 완전히 손상된 비가역적인 상태도 존재한다. 그런 상태는 원래대로 돌아갈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현대의료의 문제는 의료인들이 대증요법을 통하여 충분히 가역적인 상태까지 비가역적인 상태로 몰고 간다는 것이다. 현재 거의 모든 의사들이 고혈압 당뇨를 평생 약을 먹어야 하는 질환으로 몰아가고 환자도 아무 비판없이 고개를 끄덕이는 것은 이런 말의 힘 때문이기도 하다. 환자들은 일상에서 "죽을 때까지 약먹어야 한다"는 말을 너무 자주 듣는다. 정말 그래야 할까? 다른 가능성이나 방법은 없는 걸까?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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