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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체질과 한방약

키는 크지 않으나 다부진 느낌의 남성이 진찰실로 들어왔다. 얼굴이 붉은 이 남성은 "몸이 춥고 몸이 떨린다"고 하였다. 언제부터 그랬는지 물어보니 "술을 끊고 난 다음부터"라고 한다. 평소 술을 즐겼는데 간수치가 높게 나와서 건강을 위해 술을 끊었다. 그런데 끊고 나서 그런다는 것. 금단증상이었다.

체질을 진찰해보니 목양체질이었다. 복진腹診을 해보니 갈비뼈 안쪽으로 팽만하여 손이 들어가지 않는다. 한방에서는 흉협고만胸脅苦滿이라고 하는데 간이 기능적으로 과도하게 항진됨을 보여주는 싸인이다. 몸이 춥다는 것도 자세히 물어보니 그냥 추운 게 아니라 "몸이 더웠다 추웠다 한다"는 것.(寒熱往來) "잘 때 식은땀이 나는데 땀이 식으면 춥고 그것 때문에 잠도 잘 오지 않는다"고 한다.    

체질침을 시술 후에 소시호탕을 주고 상태를 지켜보기로 했다.이틀이 지나 왔는데 떨림이 많이 감소하였다고 한다. 예전에는 1분 간격으로 떨림이 있었는데 몇 시간 간격으로 줄었다는 것. 동시에 열도 많이 줄었다고 한다. 하지만 아직 한기寒氣가 드는 건 여전하다.   

치료를 계속 하면서 이틀을 더 지켜보니 잠도 "처음으로 푹 잤다"고 하고 한기도 사라졌다. "식욕이 없어서 끼니도 제대로 챙겨먹기 힘들었으나, 이제 제 때 끼니는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식욕이 늘었다"고 하였다. 다만 "아침에 가래가 낀다"고 하길래 금연을 권고하였다. 그 뒤로는 목이 뻐근하다고 하여 치료해주고, 모든 증상이 해소되어 전체 9회로 금단증상에 대한 치료를 종결하였다. 

필자는 <상한론>과 <금궤요략>에 있는 처방은 모두 8체질에 맞게 재분류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소시호탕은 필자의 임상경험으로는 목양체질에게만 정확히 맞았다. 여기서 '정확히 맞았다'는 것은 소시호탕이 가진 드라마틱한 효과는 8체질 중 목양체질에 한정된다는 것이다. 한방에서는 어떤 약을 쓸 수 있는(또는 사용해야 하는) 증상이 환자에게서 나오면 '~탕증'이라고 부른다. 예를 들어 이 환자처럼 흉협고만과 한열왕래에 입이 텁텁하고 식욕이 떨어지면 소시호탕증인 셈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증상이 다른 체질에서 나타난다고 하더라도 소시호탕을 쓰면 안된다. 소위 동병이치同病異治, 병은 같으나 치료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것은 체질이 다르기 때문이다. 만일 이런 점을 고려하지 않으면 심각한 부작용이 오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일본에서는 소시호탕을 복용한 환자가 간질성 폐렴으로 사망한 일이 있었는데, 체질을 모르고 병만 보고 함부로 투여했기 때문이다. 오래 전에 일본여행을 하다가 어느 서점에서 캄포(일본에서는 한방을 '캄포Kampo'라고 한다) 자료를 찾아본 적이 있다. 그런데 그 처방구성을 살펴보니 한국과 비교할 때 약재의 용량을 크게 줄인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아마도 체질 모르고 함부로 투여하다가 부작용을 많이 경험하고 그렇게 용량을 줄였으리라 생각해본다. 그런데 그렇게 용량을 줄이면 부작용은 줄일 수 있을지 몰라도 효과도 크게 떨어진다. 그러니 애초에 체질을 고려하여 투여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흔히 임상에서는 비방을 찾게 된다. 환자도 그렇고 의사도 그렇다. 모두 눈에 불을 켜고 좋은 약을 찾아다닌다. 하지만 진정한 비방은 아주 평범하고 이미 공개되어 있는 것이다. 필자가 앞에서 언급한 소시호탕은 간염을 치료할 수 있는 명약名藥이다. 이것은 이미 EBM 연구에서도 서서히 증명되고 있는 것이다. 소시호탕은 뉴욕 메모리얼 슬론 캐터링 암센터에서 C형간염 치료제로 임상시험이 진행된 적이 있는데, 인터페론에 반응하지 않는 C형간염이 간암으로 전변되는 것을 개선시킬 수 있는 가능성이 보고되었다. 하지만 체질과 증[각주:1]에 대한 정확한 진찰 없이 이 처방을 쓰면 일본의 사례에서 보다시피 사람을 잡게 된다. 비단 소시호탕 뿐 아니라 모든 약물이 그러하고, 따라서 모두 체질적으로 재분류되어야 한다. 극히 평범해보이는 처방에서 입이 다물어지지 않을 만큼 놀라운 효과를 발견하려면 그 처방들이 체질적인 관점에서 철저하게 재해석되어야 하는 것이다.  

한방약 개발의 역사를 보면, 그 초기라고 할 수 있는 <상한론>이나 <금궤요략>이 쓰여졌던 시대의 처방은 극히 단순하면서도 약효가 강력한데, 이것이 후대로 오면서 두루뭉실해지는 경향을 보인다. 이 역시 사람마다 체질이 다름을 몰랐기 때문에 그 효과 만큼이나 부작용을 많이 경험하고 그 부작용을 상쇄하는 과정에서 점점 그렇게 바뀌어버린 것이 아닐까? 이 두루뭉실한 처방을 들여다보면 여러 체질에 맞는 약재가 뒤섞여서 이 약재가 저 약재의 효과를 떨어뜨리고 저 약재가 다시 이 약재의 효과를 떨어뜨려 본래의 예리한 효과가 반감되고 마는 것이다. 부작용도 없으나 효과도 떨어진다. 그러면 치료자는 "당장 효과는 안 나왔지만 음으로 양으로 다 갔을 것이다"라는 애매한 말로 둘러대는데, 이것은 올바른 태도라고 할 수 없다. 체질을 알면 이런 폐단이 사라질 것이다. 이제마는 그의 저서 <동의수세보원> 의원론에서 고금의 처방들이 모두에게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일부 체질에만 적용됨을 지적하고, 체질이라는 개념에 입각하여 새로운 처방을 몇 종류 개발하였다. 8체질의학의 관점에서도 이런 분류가 가능하고, 치료율을 높이는데 도움이 된다. 체질을 알면 평범한 처방도 비방이 된다.

  1. 한방에서 '증證'이란 단순한 증상들의 나열이 아니라 증상들 사이의 유기적인 연결고리, 전체 증상을 관통하는 내러티브를 포함한다. 그래서 증을 아는 것은 병의 뿌리가 되는 불균형의 실상을 파악하는 작업이 된다. [본문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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